살인강도범을 의인으로 미화한 영화 ‘대장 김창수’
2017.10.12
백범 김구(본명 김창수)의 1896년 치하포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가 곧 개봉될 모양이다. 제목만 보아도 어떻게 영화가 만들었을지 뻔해 영화를 볼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는지 보자는 심산으로 영화 줄거리와 예고편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객관적 역사적 사실은 아예 무시한 채 김구를 미화해 의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윤색하고 과장하여 미화한다 하더라도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하고 돈을 갈취한 살인강도범을 국모의 원수를 갚은 의인으로 칭송하는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 영화가 다룬 치하포 사건 이후의 김구의 625일간의 이야기에 대해 한정해 이런 표현을 쓸 뿐, 그 이후의 김구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김구가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 상인(쓰치타 조스케)을 살해하고 그가 갖고 있는 돈을 일당들과 나눠 가진 것은 명백한 살인강도 행위일 뿐, 어떤 다른 명분을 갖다 붙여 미화할 수 없는 것이다.
치하포 사건의 전말은 구한말 법원이 기록한 사건 주범 김창수(김구)와 여인숙 주인 이화보를 취조한 취조문이 있으니 자세히 알 수 있다.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으로 들어가 검색창에 ‘토전양량(土田讓亮, 쓰치타 조스케)을 치면 78건이 검색되는데, 그 중에 ’독립운동사자료집‘의 ’토전양량의 격살건 취조문‘의 ’뷰어보기‘를 열면 치하포 사건의 주범 김창수(김구)와 여인숙 주인 이화보의 취조문이 나온다. 김창수를 취조한 초조, 재초, 삼초 취조문과 이화보의 초조, 재초 취조문 전문은 이 글의 말미에 그대로 복사해 올려 놓았으니 정독해 보고 실제 ’치하포 사건‘이 영화 ’대장 김창수‘와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 보기 바란다.
취조문을 다 읽어 보니 김창수(김구)가 아직도 의인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극형에 처해져야 할 살인범이라 생각하는가? 현대에 김창수와 같은 죄를 저질렀으면 사형 아니면 무기징역감이 아니겠나?
나는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서 가장 잘못 알려진 인물로 민비(민자영, 명성황후)와 김구를 꼽는다.
민비는 조선을 피폐하게 하고 무당을 끌어들여 자신의 안위와 자식을 위해 국고를 탕진했으며, 자신과 왕가의 안위만을 위해 열강을 끌어들여 줄타기 하면서 망국에 이르게 한 죄를 지었다. 또한 매관매직으로 백성을 궁핍하게 했을 뿐아니라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이기도 했다. 이런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천하의 악녀이다. 민비가 어떤 인간인지는 황현이 쓴 ‘매천야록’을 보면 잘 나온다. 오죽하면 박영효, 유길준 등의 개화파들 뿐아니라 대원군과 조선 군인들도 민비를 살해하려 했겠는가? 일본인들이 민비를 시해할 때에 길을 안내한 것 역시 조선 군인들이었고, 그 당시 길을 안내하고 도운 별기군의 대장이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의 아버지인 우범선이다.
우리는 단지 일본인에게 시해되었다는 이유로 민비를 국모로 추앙하는 왜곡된 역사를 배워 민비에 우호적이지만, 당시의 백성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죽여도 시원찮을 악녀였을 뿐이다.
이런 민비를 국모라 칭하며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것을 국모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변명하는 청년 김창수(김구)를 생각하면 기가 찬다.
김구의 실체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을 추천하니 한번 구독해 읽어 보기 바란다. 김상구가 지은 <김구 청문회>라는 책이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918177
책을 구입하기 쉽지 않는 사람들은 오마이뉴스가 백범에 대해 평가한 다음의 글을 읽어도 백범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날 것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30031
<백범일지>를 읽고 김구를 생각해 온 사람들은 <김구 청문회>나 오마이뉴스 기사를 읽고 나면 한 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사실 <백범일지>는 춘원 이광수가 백범의 일대기를 윤색해 발간한 것으로 사실을 왜곡해 김구를 너무 미화하고 신화화 해 놓았다. 치하포 사건을 객관적 사실과 동떨어지게 민비를 시해한 일본인을 살해하여 복수한 것으로 우리 국민들을 인식케 한 것도 <백범일지>이다. 이렇게 김구는 이광수에 의해 신화적 인물이 된 것이다.
친일로 변절한 것도 이광수의 큰 잘못이지만, 그보다도 <백범일지>를 써 국민들에게 잘못된 백범의 이미지를 심어 영웅으로 만든 과오가 더 크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영화 ‘대장 김창수’의 개봉을 계기로 이번 기회에 김구의 제자리 찾아주기 작업을 함께 했으면 좋겠다. 이제 김구를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을 해야 한다. 조작된 역사가 장기화가 되어 고착될 경우, 진실이 사라지고 신화가 굳어져 다시 돌려놓기가 힘들어진다. 제대로 된 김구 모습을 찾아주고 교과서도 수정해서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민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가 한 행위(악행)에 대해 책임을 묻는 역사적 규명이 필요하다.
최근 ‘귀향’(위안부 문제), ‘군함도’(징용문제), ‘덕혜옹주’, ‘박열’, ‘대장, 김창수’, ‘아이 캔 스피크’(귀향과는 다른 시각으로 위안부 문제를 다룸) 등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반일 성향의 영화들이 속속 개봉되어 나왔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정치적 의도를 담아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 그 왜곡의 정도가 역사물을 다루는 영화에서 허용되는 허구의 정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좀 나은 것 같다. ‘박열’은 영화를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연극 ‘덕혜옹주’는 비교적 사실에 기반해 만들어져 영화 ‘덕혜옹주’와 전혀 다르다)
이런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이유를 나는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국민들의 국수주의적 반일정서를 상업화하면 돈이 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좌경화된 영화판의 주류가 영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수주의는 특정 세력(주로 꼴통 좌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교육, 전파되어 강화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민족끼리’를 외치는 북쪽의 꼴통 전체주의자들을 옹호하고, 종북 논란에 빠져나오기 위한 회피 기동으로 ‘친일파 논란’을 제기한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 척결을 내세우고 민족주의(국수주의)를 강력한 수단으로 삼는다. 이들이 역사학계를 장악하여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으면서 국수적 역사관을 지속적으로 학생들에게, 국민들에게 주입하는 이유이다.
이런 국수적, 전체주의적 꼴통 좌파들이 반일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해 개봉하는 것을 내가 걱정하는 이유는 객관적 사실을 왜곡해 국민들을 오도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런 영화들을 제작하는 제작진과 스탭들, 이 영화에 투자하는 투자자, 이런 영화들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함께 역사 왜곡의 공범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들에 연관되었던 사람들은 객관적 역사적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저항하게 되고 쉽게 인지부조화나 자기합리화에 빠지게 된다. 거짓의 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게 하는 것에 본인도 모르게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대장, 김창수’를 제작한 사람들과 스탭들, 이 영화에 투자한 사람들, 출연한 배우, 이 영화를 홍보했던 사람들이 과연 김구를 살인강도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사실을 검증하거나 역사를 고증하기보다 나의 이 글에 온갖 비난을 퍼붓기 쉽지 않겠나?
이들의 이런 인식은 비단 김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뿐아니라 역사 전반에, 그리고 정치사회 전반에도 확대 적용될 것이라는 걱정이 단순한 기우일까?
80년대 운동권이 그람시를 공부하고 그의 문화전략(일상생활에서의 인식과 활동을 변화시키는 계기의 문제를 문화와 결합하려고 시도)을 90년대 이후 치밀하게 우리 사회, 특히 문화계에 추진해 왔던 것이 요즈음에 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나는 본다. 문화계는 이들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다른 목소리는 내기 힘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특히 영화판은 그들의 독무대다.
비열하면서도 전략적인 꼴통 좌파들의 문화계 장악과 문화예술의 정치화에 대해 용기 있게 비판하지 못하는 나약한 우리 지성계가 어느 때보다도 원망스럽다.
스산한 가을 바람 만큼이나 내 가슴도 스산해지는 것 같다. 봄은 오겠지만, 겨울을 맞이하고 그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 무척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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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전양량(土田讓亮) 격살건 취조문
해주거 김창수(金昌洙) 당년 21세
초초(初招)
[문] 그대가 행한 일은 이미 이화보(李化甫)가 명백하게 고한 바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
[답] 내가 금년 정월 24일 용강(龍崗)으로부터 안악(安岳)으로 가던 도중에 평양 사람 정일명(鄭一明)과 함경도 정평(定平) 사람 김장손(金長孫)과 김치형(金致亨)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치하포(?河浦)에 와서 점주(店主) 이화보를 찾아가 저녁을 먹고 그곳에 투숙하였다.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 동행한 세 사람은 약간의 현금을 가져다가 점주에게 8백금을 맡기고, 그외의 돈은 세 사람의 노자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본인은 일본인의 환도(環刀)를 탈취하여, 당나귀 한 마리를 일흔 다섯냥으로 사서 단기(單騎)로 재령(載寧)으로 향했다가 동년 3월에 집으로 돌아왔다가 해주(海州) 순사에게 체포되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건양(建陽) 원년 8월 31일
인천항 경무관 김순근(金順根)
죄인 김창수(金昌洙)
김창수 재초(再招)
[문] 그대는 동당 몇 명과 이화보(李化甫)의 집에서 함께 유접(留接)하다가 일본 사람을 죽였는가?
[답] 처음 평양 남문 밖에서 초면인 상민(商民) 세 사람을 만나 동행하여 이화보의 집에서 함께 지새다가 일본 사람을 죽일 때 그들 세 사람은 도망했다.
[문] 그대는 동행 세 사람과 이화보(李化甫)의 집에 도착하여 그대가 한 말 가운데 동당 몇 백명이 곧 뒤따라 도착할 것이니 짚신(草鞋) 등의 물품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였다는데 이는 동당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가?
[답] 당시는 각처에 도적들이 봉기하기로 그런 허세를 부림으로써 점주를 현혹케 하려던 것이다.
[문] 그대는 일본사람을 죽인 뒤 의병이라 자칭하고 일본인이 배에 가지고 있던 금품을 탈취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배 안에 돈을 가지고 있음을 미리 알고 재물을 탐하여 일본인을 죽인 것이 아닌가? 사실대로 바로 말하라.
[답] 일본인을 죽인 뒤 그의 배에 돈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동행 세 사람과 함께 배 안으로 들어가 현금을 가져왔다.
[문] 가져온 돈이 몇 냥이나 되며 무엇에 쓰려고 한 것인가?
[답] 금액량은 잘 모르게,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 다섯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 가량으로 안다.
[문] 그대는 처음 공술에서 8백냥을 이화보(李化甫)의 집에 맡겼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엽전 백냥 뿐이라고 하니 대체 어떻게 된 까닭인지 사실대로 바로 말하라.
[답] 처음 공술은 갑자기 생각이 안나 잘못 말하였으나, 이제 자세히 생각해 보니 8백냥을 맡긴 사실은 없고, 동행 세 사람의 노자와 당나귀 한 마리 값 일흔다섯냥 뿐이었다.
[문] 일본인을 때려죽일 때에 쓴 흉기는 무엇이며, 동행 세 사람도 함께 협력하였는가?
[답]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가기에 강변까지 쫓아 따라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하여 죽인 뒤 시체를 끌어다가 얼음판에 버렸으며, 동행 세 사람은 이 일에 관계한 바가 없다.
[문] 이화보(李化甫)의 공술 가운데 그대는 동행 세 사람과 함께 합세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그대는 단독으로 행하였다 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있었던 그대로 말하도록 하라.
[답] 일본인을 죽일 때 부근 사람들도 놀라 도주하였거늘 점주 이화보가 감히 어떻게 참관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이화보 자신이 꾸며낸 말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문] 배 안의 돈을 가져 올 때 근처의 부락민들도 혹 참가한 일은 없는가? 그리고 사건이 있기 전에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답] 그때 동민들은 모두 도망하고 참가한 바 없으며, 동행 세 사람과 선원 몇 사람은 돈을 가져올 때 참가한 바는 있다. 그리고 본인은 단발을 피하여 안주(安州)로 가서 체류하다가 단발령이 정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치하포(?河浦)에 있는 이화보의 집에 유숙하다가 이 일을 감행하였다.
[문] 그대는 자칭 중국에서 출첩(出帖)한 좌통령(左統領)이라 하였다는데 진실로 중국에서 출첩한 것인가,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자칭한 것인가?
[답] 그것은 가칭이 아니라 중원(中原=중국대륙) 사람 서경장(徐敬章)의 하첩(下帖)을 받았으며, 이밖에는 할 말이 없다.
건양(建陽) 원년 9월 5일
기초(起草) 서기 진정진(秦貞鎭)
경무관 김순근(金順根)
죄인 김창수(金昌洙)
김창수(金昌洙) 삼초(三招)
[문] 그대는 본래 해주 사람인가?
[답] 해주에서 생장하였다.
[문] 그대의 양친은 생존하고 있는가?
[답] 생존하고 있다.
[문] 몇 형제인가?
[답] 형제는 없고 7대독자이다.
[문] 그대의 행위는 이미 초초와 재초에서 파악하였거니와 무슨 불협(不協)한 마음이 있어서 이토록 인명을 상하였는가?
[답] 국민 된 몸으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 거사를 행한 것이다.
[문] 그대는 신민 된 자로서 통분한 심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방관은 법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대 임의로 일본인을 죽이는 것은 방자스러운 처사가 아닌가?
[답] 자신이 생각컨대 비록 지방관에 고한다 하여도 실시치 않을 것이므로 이 거사를 착수하였다.
[문] 그대의 1, 2회 공술에서 돌과 몽둥이로 일본인을 타살하였다고 했는데 그때 일본인도 칼을 차고(佩刀) 있었으면서 왜 대적하지 않았는가?
[답] 일본인을 발로 차서 넘어지게 하자 그때 그가 칼을 빼려하므로 돌로 때려 땅바닥에 쓰러지게 하고 즉시 칼을 빼앗아 버린 뒤 동행 세 사람과 방안에 있던 여러 행인들이 모두 분기를 띠고 힘을 합해 타살하였다. 그런 뒤 여러 사람들이 사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 조처를 걱정하므로 내가 그들에게 시체는 매장하지 말고 얼음이 언 강에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렇게 한 것이다.
[문] 그대와 동행한 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답] 이미 앞서 한 조서에서 모두 밝혔다.
[문] 그대는 1, 2회 취조 때에는 단독으로 범행하였다고 하여 놓고 지금은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해 사살했다고 하니 앞뒤 말이 같지 않음은 어찌된 일인가?
[답] 내가 먼저 일을 저지르고 나서 나중에 여러 사람들이 합세한 것이므로 내 자신이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인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도모한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공술한 것이다.
[문] 그대는 이화보(李化甫)와 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는가?
[답] 그 상점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인데 어찌 전부터 알고 있었겠는가.
[문] 이화보는 점주로써 그대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목도하였는가?
[답] 이화보는 겁에 질려서 피신하고 없어서 사람을 보내 불러 왔었다.
[문]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하였는가?
[답]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8백 냥은 점주에게 맡겼다.
[문] 그대가 처음 사건을 일으킨 뒤 여러 사람들이 합세하여 타살하였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데 그것은 일을 일으킨 책임을 면하려고 이렇게 공술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대답하라.
[답] 나는 이미 혈분(血忿)으로써 손을 씻은 즉 어찌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씌워 내 자신이 모면하고자 하겠는가. 당장 모든 사람들을 지휘하여 일본인을 타살하고 무슨 딴 수작이 있겠는가.
죄인 김창수(金昌洙)
건양 원년 9월 10일
인천항재판소 판사 이재정(李在正)
일본영사관 경부 신곡청(神谷淸)
인천항재판소 주사 김창건(金昌鍵)
안악군 치하포(?河浦)점주 이화보(李化甫) 년 48 초초(初招)
[문] 일본인 토전양량(土田讓亮) 피고 건에 점주는 김창수(金昌洙)의 행동을 틀림없이 자세히 보았을 것이니 조금도 감추지 말고 사실대로 고백하도록 하라.
[답] 제가 본토의 점주인데 본년 정월 24일 밤에 이름 모를 일본인 한 사람이 통역하는 아이 하나와 와서 저녁밥을 사 먹은 뒤 휴식을 취하고 있을 즈음에 비도 김창수(金昌洙)가 일당을 거느리고 용강(龍崗)으로부터 나루를 건넜는데 그때 행인 13명도 그들이 올 무렵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청하므로 밥을 지어 주었더니 일본인은 선원들과 함께 유숙하려고 선박처로 나아가고 통역하는 아이 하나와 선원 한 사람만 저희 여인숙에 투숙케 되었읍니다. 그런데 김창수의 일행도 투숙을 하고 날이 밝자 조반을 재촉하여 그들이 먹으려 할 즈음에 일본인도 다시 돌아와 아침밥을 먹은 뒤 그냥 앉아 있었읍니다. 그런데 조금 뒤 통역하는 아이가 급히 달려와 싸움이 벌어졌는데 매우 위급하니 속히 와서 구원해달라고 하였읍니다.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읍니다. 그러므로 그가 간 곳은 알 수 없으나 일본인을 살해한 것은 김창수가 분명합니다.
건양(建陽) 원년(元年 8월 31일)
인천항 경무관 김순근(金順根)
죄인 김창수(金昌洙)
이화보(李化甫) 재초(再招)
[문] 당초 김창수가 일행 누구 누구와 당신 집에 투숙하다가 일본인을 죽였으며, 그리고 당신은 전부터 김창수와 알고 있었는가?
[답] 치하포진(?河浦津)을 건너 올 때 그의 동행이 17명이더니 나루를 건넌 뒤 13명은 다른 곳으로 가고 김창수와 세 사람이 함께 저의 집에 도착하여 투숙하다가 일본인을 죽였으며, 본인은 김창수와 알지를 못합니다.
[문] 김창수가 거사를 할 때 동행 세 사람도 힘을 합하였으며, 그때 범행에 쓴 기구는 무엇인가?
[답] 김창수가 범행을 저지를 때 동행 세 사람도 같이 덤벼들기에 말리려고 하자 김창수가 달려와 때리고 그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저놈도 때려죽이라고 고함을 치므로 무서워 도망하였읍니다. 그 당시는 캄캄 밤중이라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으므로 범행에 쓴 물건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어려웠읍니다.
[문] 김창수가 자칭 의병이라고 말한 것은 일본인을 죽이기 전인가 죽이고 나서인가?
[답] 일본인을 살해한 후에 좌통령 김창수라는 명함을 내보였습니다.
건양 원년 9월 5일
기초서기 박영래(朴永來)
인감 전보(仁監電報)
범부 김창수 옥안 이화보(李化甫)를 속히 판결하여 곧 석방하여 돌아가게 하심을 기대합니다.
건양 원년 10월 2일 상오10시
인감(仁監) 이(李)
답전(答電)
김창수 안
이화보의 공술에 의하여 무죄 방면함.
10월 2일 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