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은 제가 좋아하는 동네 중 하나예요.
처음 갔을 땐 서울같지 않게 옛스러운 정취와 정겨운 분위기가 남아 있어 푸근하게 느껴졌고요.
간송 미술관 전시회를 드나들었을 땐 아담한 뜰의 초록빛들과 줄서 있는 젊고 풋풋한 처녀들을
싱그럽게 바라보았었고요.
구보 박태원-일제강점기 시절 구인회 활동했었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란 소설로 알려져 있는데
자세하게는 알지 못하다가 그 아드님이 쓴 책을 읽었어요.
그 시대 문인들과 그 시대에 대해 관심이 많거든요.
약종업을 해서 넉넉한 가정에서 자라 동경유학 다녀오고 소설 쓴답시고 방구들 지고 앉아
눈 나빠진 어느 인텔리...박태원....
이상, 정인택, 이태준, 김기림 등 그 시절 유명한 문인들이 박태원의 결혼식에 와서
축사와 함께 한두줄씩 재치있는 방명록을 남긴 대목도 재미있고
돈암동 집에서 아버지 구보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아들 저자,
성북동에 집을 지어 거기서 소설 창작에 힘쓰려 했으나 세월은 그들 가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아
(구보 박태원은 육이오 전쟁 당시 평양 문인 시찰을 갔다가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고
아버지와 큰딸, 박태원의 남동생, 여동생은 북에 나머지 가족들은 남쪽에 남게 되어 영영 이별하게 된답니다)
영원히 헤어지는 이야기는 가슴이 먹먹하죠.
소설가 이태준이 살던 집이 성북동에 수연산방이란 아담한 한옥찻집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옛 외가 시골집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예요.
구보 박태원도 이 집에 놀러갔었나 봐요.
그 당시 성북동은 서울이 아니었고 성북리였다네요.
구보 박태원의 절친이었던 이상이 69라는 까페를 열었는데,
구보는 69라는 뜻을 몰라 엉뚱하게 추측하는 손님에게 냉소하는 이상이
변태적이라며 이상은 상식을 초월하게 변태적이라고 썼습니다.
이상과 한때 사귀었던 여성 권영희를 구보의 죽마고우 정인택이 짝사랑하여
자살기도하게 되고 이상은 권영희를 정인택과 짝지어 줍니다.
그러나 이 부부 또한 육이오 때문에 갈라져 권영희는 북에서 오지 않는 남편 정인택을 기다리다가
역시 홀로 된 구보 박태원과 재혼합니다.박태원은 죽마고우의 부인과 재혼한 것이죠.
지금 사람들 눈에 봐도 파격적인데, 서로 너무 사는 게 힘들고 구보는 시력까지 잃어가서
서로 필요하에 맺어진 것 같아요....
서울과 우리나라 땅 곳곳이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 고통, 기쁨, 사랑, 한 등을 담고
나이를 먹어가고 세월이 흘러간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