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영화의 하나로 꼽을 ‘내 사랑’
2017.08.02
이미 입소문을 통해 이 영화는 극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실제 영화를 보고난 후의 감동이란 말로 표현하기 힘드네요.
전날 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에도 단 한번도 졸거나 하품을 한 적도 없이 몰입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화가 Maudie Lewis의 사랑과 인생을 그린 영화인데, 내 생애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을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먼저 감독(에이슬링 월쉬)의 연출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멜러물이라 자칫 지루하기 쉬울 것을 우려해 모드의 일대기 중 남편 에버렛과 만나는 과정(모드 인생의 후반)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전의 이야기는 과감히 생략하는데도 모드의 이전 인생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하더군요. 모드 인생의 후반만을 보면서도 전반을 함께 보게 만들었습니다.
불필요하게 모드의 어두운 과거를 표현하지도 않았고, 숙모와 오빠에 의해 다른 집으로 입양되어 딸을 잃게 된 사실도 억지 눈물을 만드는 신파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담담히 모드와 에버렛의 삶과 사랑을 물 흐르듯 그려내면서 순간 순간 모드의 윗트도 곁들여 관객의 고양된 감정을 절제시키면서도 감동은 오히려 증폭시켜 놓더군요.
배경이 된 캐나다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화폭에 담듯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모드와 에버렛의 순수한 사랑을 매치시켜 놓은 것 같아 좋아 보였습니다.
에덴 호크(에버렛 역)와 샐리 호킨스(모드 역)의 연기도 뛰어났습니다. 이 두 배우가 저보다 한참 어린 1970년생(에덴 호크)과 1976년생(샐리 호킨스)이라는데 놀랐습니다. 40대의 배우가 중년과 노년을 저렇게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을까요? 이 두 배우들을 알게 된 것도 이 영화가 내게 준 고마움입니다.
에버렛이 손수레에 모드를 태우고 들판을 가로지르거나 길을 오가는 장면은 감동입니다. 집을 나서 갈 때는 모드와 에버렛은 같은 방향을 보고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들판에서는 둘이 마주 보며 에버렛이 손수레를 끌고 모드는 앞에 앉아 타고 옵니다. 아무런 설명도 둘의 대화도 없지만 그 장면만으로도 둘의 순수하고 진심어린 사랑이 전해 오는 듯 하더군요. 부부의 인생이, 부부간의 관계가, 부부간의 신뢰가 무엇인지도 느껴지기도 하구요.
모드의 그림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모드 그림을 사기 시작한 산드라(캐리 매쳇 분)가 모드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할 때, 모드의 답이 저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신은 보고 느끼고 표현하고 싶은 대로 그리기 때문에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드에게는 창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그것 자체가 세상이고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모드는 자신만의 창을 가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드가 창을 통해 그린 그림들은 처음에는 현실이 아니라 모드의 소원이고 이상향이었는지 모르지만, 에버렛과 사랑을 키우고 행복을 느끼면서 모드가 본 진정한 세상이었지 않았을까요? 모드의 이러한 개인적 체험을 어떻게 산드라에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모드가 산드라에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은 그림의 기법이 아니라 개인의 인생이겠지요. 인생은 원래 고단한 것이고,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존재라는 사실만을 산드라에게 알려줄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오는 중간 중간에 모드 루이스가 그린 실제 그림들이 나옵니다. 영화를 본 후라 그런지 몰라도 그림들이 하나 하나 모두 아름답고 순수하고 뭉클하게 다가오더군요.
제가 요즈음 ‘아서 단토’의 <미를 욕 보이다>라는 예술철학 관련한 어려운 책을 억지로 읽고 있는 중인데, 모드의 그림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제 예술 수준을 높이고 구상주의나 초현실주의 작품, 엔디 워홀의 팝아트 등 현대미술을 나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이 책에 손대기는 했는데 아직 제 수준에서는 무리인 것 같습니다.
고대로부터 예술과 동일시되었던 비례, 균형, 조화의 美가 아니라, 아름답지 않고 추한 것이나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것도 예술일 수 있으며, 표면으로 나타나는 ‘망막의 전율’을 통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림의 의미를 중심에 두는 예술철학을 주창하는 책인데, 솔직히 저는 ‘아서 단토’의 말을 쉽게 이해하기도 힘들 뿐아니라 동의하기에도 제 예술적 수준이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모드의 그림을 보면서 저는 그냥 제 나름의 예술철학을 고수하기로 하고, 이 책 읽기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겨우 50 페이지 정도만 읽었을 뿐이지만.
‘아서 단토’는 미를 포기하고 경멸하면서 미를 파괴하려는 현대예술의 충동을 건강한 움직임으로 긍정하는지 몰라도 저는 그냥 ‘르노와르’의 말대로 그림을 보는 것이 제 정신건강에 좋을 듯합니다.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며 예쁜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유쾌한 것이 너무 많은데 또 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는가”
모드의 그림은 난해하지도 추하지도 않으며, 밝고 경쾌하고 예쁩니다. 모드가 세상을 보는, 모드가 세상을 담은, 모드가 바라는 세상이, 모드의 인생이 보이는 그림 같아 저도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림을 보고 이런 감정을 느끼면 족한 게 아닐까요?
왜 이런 영화들이 상영관이나 스크린에서 홀대를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들은 꼭 보시기를 강추합니다. 마눌님 손 잡고 가서 보면 더 좋고, 마눌님 아니라도 친구랑 같이 가도 좋습니다. 마음이 저절로 정화됨을 느낍니다. 헐리웃의 블록 버스터 흉내나 내는 요즈음 국산 영화보다 백배, 천배 낫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