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서울 동작구의 작은 보습학원 앞에는 몇 년째 똑같은 현수막 하나가 내걸려 있다. ‘축! ○○고 ○○○양 서울대 ○○과 합격.’ 굳이 분류하자면 하위권 학과에 해당하지만, 최초의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한 동네학원 원장님의 벅찬 보람과 긍지가 자간마다 흘러 넘친다. 출퇴근길 지나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삐져나오며 혼잣말을 다 중얼거릴 정도. ‘○○아, 공부는 잘하고 있니?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 한국사회의 역군이 되어다오. 강남 금수저들한테 기죽지 말고.’ 남들은 저런 플래카드가 눈꼴사납다지만, 나는 볼 때마다 대치동에 가지 않은 ○○양과 그 부모님, 학원 원장님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다. 학군 안 좋은 평준화 지역 일반고에서 동네학원에 다니며 이룬 저 성취가 더 없이 대견하다.
어떤 반론들이 나올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서울대 입학이 성취의 잣대가 되는 구시대적 학벌 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한다, 교육을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보는 저렴한 사고방식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개천에서 용 나기보다는 살 만한 개천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등등. 말인즉슨 구구절절 옳다. 그러나 발화(發話)라는 행위는 그 내용보다 형식, 주체, 시점, 상황이 더 많은 정보를 발신한다. 누가 저 말을 하는가. 왜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학교수들이며, 거개가 서울대를 나왔고, 자기 자식을 특목고와 로스쿨, 의전원에 보낸 사람들인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사람들 중 개천 출신을 본 일이 없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고 웅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 뒤엔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용이 되고 말았네. 미안~’이 생략돼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악의적 생각마저 든다.
교육은 역사상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었던 적이 한번도 없다. 그것만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하면 옳지 않으나, 그리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왜 교육만이 성공의 사다리인가, 교육 말고도 개천에서 강으로 거슬러 오를 더 많은 사다리들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지, 교육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라며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과 그 자식은 이미 올라온 사다리. 개천용 반대론자들에겐 개천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유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내는 논리적 전망만 승할 뿐 현재를 지배하는 가난의 울분을 너무 모른다. 그러니 내가 하는 사교육은 아이의 재능을 꽃피워주려는 고상한 욕망이고, 네가 하는 사교육은 신분상승에 목을 건 저렴한 욕망이 된다.
내 주제에 이만하면 용이지 생각하는 나로서는 개천에서 아등바등 기어올라 여기라도 와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곳은 살기가 이토록 좋구나. 내 가족, 친구, 친척, 이웃들도 다 건너오면 좋겠다, 나만 건너와 슬프고 미안하고 외롭다, 교육 말고 다른 방편으로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개천용들은 쉽게 개천을 저버린다고 ‘내추럴 본 드래곤’들은 함부로 말하지만, 떠나 돌아오지 않을지언정 한 명이라도 더 위로 올려 보내고 싶은 게 개천의 애틋한 마음이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 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 데 힘을 쏟자!” 몇 해 전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던 어느 유명인사의 문장들이다. 그의 말마따나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사회는 도래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올라오지 말라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니라면, 개천용을 더 이상 꿈꾸지 말라는 말을 아직은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히 그 말을 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먼저 아이들 손 꼭 잡고 개천으로 내려오라. 아직은 개천이 따뜻하지 않아 올 수 없다면, 그 입 다물라.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469&aid=0000223174
박선영 차장대우 aurevoir@hankookilbo.co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36.5] 따뜻한 개천으로 내려오든가
그 입 다물라 조회수 : 791
작성일 : 2017-08-02 21:59:46
IP : 223.62.xxx.184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개천피래미
'17.8.2 10:12 PM (219.251.xxx.5)쓸쓸한 기사..
잘읽었습니다, 행복님 ㅠ2. ...
'17.8.2 11:05 PM (39.120.xxx.165)모두가 용이 될 필요는 없지만
미안 나랑 내 자식은 이미 용이야
너희들은 개천에서 아웅다웅 고만고만하게 만족해라3. 음
'17.8.2 11:42 PM (61.74.xxx.196) - 삭제된댓글개천이야기는 ㅈㄱ이 한 말인가요?
특목고. 로스쿨. 의전.....
영재학교.....
개돼지들은 범접해서 안되는곳들인가 봅니다.4. 음
'17.8.2 11:45 PM (61.74.xxx.196)개천이야기는 ㅈㄱ이 한 말인가요?
특목고. 로스쿨. 의전...
영재학교...
개돼지의 자식들은 범접할 수 없는곳인가 봅니다.5. .....
'17.8.2 11:51 PM (220.71.xxx.152)조국도 하고 서천석도 했죠
추천이 있다면 누르고 싶은 글이예요
그들은 선민의식이 있나봐요6. ...
'17.8.3 4:52 AM (50.67.xxx.52) - 삭제된댓글선민의식이 아니죠.. 한국을 바꾸고 싶은 거죠..
기존 사고 방식에 맞춰 살던 사람들은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아 반대하는 거구요..7. 퇴화?
'17.8.3 12:56 PM (223.62.xxx.246) - 삭제된댓글음서제를 개선한게 과거제 아닌가요?
한국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요.
머 딱히 진보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이 진보인척~~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N
번호 | 제목 | 작성자 | 날짜 | 조회 |
---|---|---|---|---|
715290 | 신도안쪽맛있는식당요 3 | 점순이 | 2017/08/05 | 528 |
715289 | 어린 아기 엄마나 아기 키워보신 분들 질문요! 9 | 걱정됨 | 2017/08/05 | 1,309 |
715288 | 최진실 딸 말도 무조건 믿으면 안될듯 64 | 음 | 2017/08/05 | 27,136 |
715287 | 오천년 동안 기독교 청정국이었어요. 12 | ... | 2017/08/05 | 2,852 |
715286 | 아까 유기견 보호소 물어보신 분이 계신데요 1 | 같이해봐요 | 2017/08/05 | 605 |
715285 | 다른건괜찮지만 한가지가치명적인 남친.. 28 | 0 | 2017/08/05 | 7,984 |
715284 | 혹시 이영화 아시는 분요... 3 | .... | 2017/08/05 | 1,111 |
715283 | 노견 키우면서 처방사료나 지병치료 하시는 분들 11 | . | 2017/08/05 | 1,142 |
715282 | 30대 의사들 대세는 부부의사인가보네요 23 | 결혼하는 | 2017/08/05 | 12,692 |
715281 | 뮤지컬 공연 좌석.. 어느 급으로 사시나요? 7 | 공연좌석 | 2017/08/05 | 1,787 |
715280 | 택시운전사 5 | 하.... .. | 2017/08/05 | 1,281 |
715279 | 홈쇼핑 상담하는데 전화로 성희롱하면 4 | 홈쇼핑 | 2017/08/05 | 1,591 |
715278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이번 초등임용 티오문제를 일으킨 장본인 아.. 4 | ㅁㅁ | 2017/08/05 | 1,939 |
715277 | 이런 사람 이해 되시나요?? 5 | ... | 2017/08/05 | 1,252 |
715276 | 엄마가 노후자금 1억을 받을까요? 21 | ㅇㅇ | 2017/08/05 | 6,277 |
715275 | 수면제 복용후 잠든 사람 깨워도 되나요 4 | 어떻게하지 | 2017/08/05 | 5,294 |
715274 | 패딩 소매 5 | 의자 | 2017/08/05 | 740 |
715273 | 기내에 오징어젓 반입 될까요(밀봉제품) 9 | 오늘은선물 | 2017/08/05 | 4,688 |
715272 | 아들 엄마들 보세요 7 | 헐 | 2017/08/05 | 3,589 |
715271 | 백팩 등에 맸을때 어떤면이 앞인가요? 5 | 남펀과 의견.. | 2017/08/05 | 1,084 |
715270 | 200억 박정희 유물관 건립을 취소시키기 위한 구미참여연대 투쟁.. 6 | ... | 2017/08/05 | 1,235 |
715269 | 파파이스 이번주 쉬는거죠? 1 | 휴가 | 2017/08/05 | 855 |
715268 | 나혼자산다 한지민 옷 어디껀지 아시는분 1 | 옷 | 2017/08/05 | 10,501 |
715267 | 슈스스가 뭐하는 사람이예요? 12 | ᆢ | 2017/08/05 | 5,860 |
715266 | 문재인 '대북전단지 살포 막을 방법 찾으라' 5 | .... | 2017/08/05 | 8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