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이제 과학에도 개입하려 하나 - 서울대 병원의 백남기씨 사인 정정
2017.06.17.
그제 서울대 병원은 백남기씨의 사망원인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정정한다고 발표하고 유족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저는 이 발표문을 보고 씁쓸함을 감출 수 없더군요.
주치의인 백선하 교수의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정권이 바뀌었다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의 병원이 정권의 입맛에 맞춰 주치의의 의견이나 입장은 들어보지도 않고 저런 식으로 사망원인을 정정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서울대의 정정 발표에도 불구하고 백선하 교수는 당초의 자신의 주장을 굳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설에는 백선하 교수가 미국에 출장 간 사이에 서울대 병원측이 사인 정정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박근혜 정부가 백선하 교수나 서울대 병원측에 압력을 행사하여 사망 원인을 병사로 할 것을 요구했다거나, 백선하 교수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여 그런 판단을 했다면 당연히 박근혜 정권과 백선하 교수는 비판 받아 마땅하고 사법처리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울대병원의 자체 조사에서도, 언론의 취재에서나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검찰과 특검의 조사에서도, 심지어 정권이 바뀌고 나서도 박근혜 정권이 외압을 가했다는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백선하 교수를 잘 아는 사람들이나 서울대병원 인사들도 백선하 교수는 소신이 뚜렷하여 외부 압력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백선하 교수가 병사로 사망진단서를 쓴 것은 자신의 의학적 소신에 따른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백선하 교수는 사망진단서에 최종 사망 원인을 병사라고 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경찰의 물대포나 빨간 우의의 가격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차적 원인을 외인으로 적시했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치료하고자 했으나 유족들의 거부로 치료가 중단되게 되어 자신이 치료하고자 한 신부전증으로 백남기씨가 사망했음으로 최종 사인을 병사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치의의 의견은 들어보지 않고 정권의 눈치를 보며 일방적으로 사인을 정정하는 것이 온당합니까? 사망원인을 주치의의 동의 없이 이번과 같이 병원의 독단으로 일방적으로 정정하는 것이 법적으로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이번 서울대병원의 정정과 같은 일이 전례가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사실 백남기씨의 사망 원인이 병사인지 외인사인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백남기씨의 사망은 물대포의 직사이든 빨간 우의의 가격이든 외인에 의한 충격이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경찰 뿐아니라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단지 물대포 직사만 있었더라면 사망까지 이르렀을까, 빨간우의의 가격이 고의든 아니든 백남기씨 사망에 결정타를 날린 것인가가 쟁점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백남기씨 유족이나 자칭 진보진영은 병사냐 외인사냐라는 극히 형식적 문제를 본질적 문제인 것처럼 몰아가고 외인사라는 서울대 병원측의 정정 발표가 빨간우의의 가격이 없었다는 증거인 것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사태를 보며 진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진보진영이 백남기씨 사망 원인을 규명해 달라고 그렇게 격렬하게 시위를 하고,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부검은 극구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족이 사망 원인 규명을 요구하면 과거에는 경찰이 서둘러 화장을 하는 것이 통상의 모습이었으나 이번에는 경찰과 검찰은 부검하자고 하는 반면에 오히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족측이 부검을 거부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족들과 진보진영은 왜 부검을 거부한 것일까요? 고인의 신체에 칼을 대는 것은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서요? 장준하 죽음의 원인을 규명한다면서 30년이 지나서 장준하의 유골을 무덤에서 파내어 감식하지 않았나요? 부검하면 모든 의혹이 해소되고 논란은 종식될 텐데 왜 그 간단한 부검을 끝까지 거부하고 화장을 했을까요?
지난 16일에 경남 함양에서 경찰의 테이저건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2005년 경찰이 테이저건을 도입한 후에 테이저건으로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는군요.
정신질환이 있는 아들이 난동을 피운다는 신고를 받고 간 경찰이 1시간 동안 이 아들을 설득하고 진정시키려 했지만 낫과 삽으로 경찰을 공격해오자 부득이 경찰이 갈비뼈 아래와 팔에 테이저건을 쏘았다고 합니다. 이 아들은 충격을 받고 쓰러졌으며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했고 병원측은 ‘원인불명 심정지’로 사망진단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 사건과 백남기씨 사건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백남기씨의 불법폭력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의 물대포 사용 : 함양의 정신질환자의 난동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의 테이저건 사용.
1차적 외인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신부전증에 의한 병사라고 진단한 백선하 교수 : 원인불명의 심정지로 진단한 함양의 모 병원.
경찰이 불법 폭력시위와 낫과 삽으로 공격하는 난동자를 진압을 하기 위해 물대포와 테이저건을 사용한 것은 정당하며 원인 제공은 백남기씨와 정신질환자가 했음으로 사고의 1차적 책임은 백남기씨와 정신질환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경찰이 물대포와 테이저건을 매뉴얼에 따라 사용했는지는 논란이 됩니다. 백남기씨와 정신질환자의 사망에 경찰의 진압장비에 의한 충격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타당합니다. 백선하 교수는 1차적 원인은 외인이라 하면서 최종 사망원인을 병사라 했고, 함양의 병원은 정신질환자의 사망원인은 ‘원인불명의 심정지’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건(사고)의 원인과 경찰의 과잉진압 논란, 사망원인의 진단은 매우 유사합니다만, 두 사건을 대하는 진보진영이나 유족들, 언론들, 현 정권, 심지어 국민들의 태도는 판이합니다.
함양의 정신질환자 유족들이 원인규명을 요구하자 함양 경찰도 사망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부검하겠다고 했고 유족들도 부검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남기씨 유족과 진보진영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도 부검은 극구 거부했지요.
함양의 사망자 부모는 아들의 시신에 칼을 대는 것을 좋아하고 고인에 대한 예의가 없어서 부검에 동의했을까요? 이들은 원인 규명에 부검이 필수적이고 부검이 자신들이 원하는 정확한 사망 원인을 밝혀줄 것이기 때문에 부검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시골의 촌부들도 다 아는 부검의 필요성을 배울 것 다 배운 백남기씨 유족이나 진보진영이, 그것도 사회적 논란으로 시끄러운 사건에 대해 부검을 거부하는 것이 말이 될까요?
저는 경찰의 물대포 직사가 백남기씨 사망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물대포는 분명 백남기씨 사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인정합니다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인지, 아니면 빨간 우의의 가격에 의한 2차 충격이 사망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인지는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시의 영상을 분석해 보았을 때 빨간 우의가 고의인지 불가항력적인지 모르지만 그의 가격은 있었고, 그 가격 이후 백남기씨의 팔다리가 축 늘어지고 얼굴 전면에 피가 흘렀던 것, 두개골의 함몰 부위나 치아의 부러짐 등으로 보아 빨간 우의의 가격이 백남기씨 사망에 직접 관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에 민형사상 소송이 제기된 상황임으로 국가(경찰)의 잘못 정도에 따라 그 배상 수준이나 해당 경찰에 대한 형사 처벌 수준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물론 백남기씨의 명예도 중요하고 유족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해당 경찰이 자신의 잘못 이상으로 처벌받는 것도 부당합니다. 법의 심판과 처벌은 위반의 정도와 위반의 결과에 비례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국가가 국가의 잘못 이상으로 국민의 혈세로 보상해 주거나 경찰이 자신들의 잘못 이상으로 처벌받는 것은 부당한 것이죠. 그래서 진상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이를 위해 부검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논란이 큰 사건은 부검을 하는 것이 통상적이며 그래서 서울대병원의 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부검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화장하고 부검을 거부했으면서 사망원인이 병사에서 외인사로 정정되었다는 것을 들어 유족이나 진보진영이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거나 진상이 규명된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서울대 병원측의 외인사로의 정정 발표는 진상 규명과 무관하며 실질적인 의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 진보진영은 본질은 외면하고 선전선동의 소재로 이 정정 발표를 이용하는 것이고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뿐이죠.
서울대병원측의 이번 외인사로의 정정 발표는 유의미한 진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권에 따라 과학도 굴종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일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논리가 경제에 개입해 시장질서를 왜곡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는 과학의 영역에까지 정치가 노골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젠 객관적 인과관계가 확실한 과학의 영역에서도 정권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습니다. 객관적 증거와 과학적 논증보다는 어떤 세력의 입맛에 맞는 결과가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종교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나 과학을 종교의 믿음으로 접근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라 생각하지 않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주의적 근본주의에 빠진 극단적 보수주의 기독교가 하느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며 구약의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해 지구의 역사가 6천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창조과학회의 주장이 맞는지 틀린지를 떠나 저런 식으로 신의 존재나 우주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겠다는 접근 방식 자체를 저는 부정합니다.
마찬가지로 경제에 정치 논리를 개입하면 안 되고, 과학의 영역에, 특히 전문지식이 필요한 의학 분야가 정치 세력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압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주치의 백선하 교수의 동의도 없이 서울대 병원측이 사인을 정정한다는 것은 사인을 외인사라 기록하는 것이 설령 맞는 것이라 하더라도 집권한 정치 세력과 여론에 굴종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