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표상하고 있는 가치를 신뢰하고, 그 가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그리고 당신의 근육을 보탰다면, 당신은 그 사람의 타락에 분노해야 마땅하다. 당신은 당연히 그럴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그 타락을 단정하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나온 내 목소리인지 살펴볼 일이다. 그저 지나가는 확성기에서 무책임하게 반복되는 소리들을 내 목소리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근심해야 한다. 그 타락이 정말 타락인지 아니면 그저 손쉬운 재단인지 우리는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건 그 가치를 공유했던 사람으로서 그 가치와 우리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면서, 그 가치를 표상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오랜만에 주신부님과 한 시간 남짓 대화했다.
대화 후반부 매개는 곽노현 사건.
구글플러스에선지 트위터에선지 '사람은 버리되, 정책은 지키자' 라는 말을 듣고, 아, 그렇지, 그래야지, 가볍게 마음 속으로 되뇌었는데, 주신부님과 대화하면서 내가 너무 게임 논리로, 전략적으로,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버릴 때 버리더라도, 그 사람을 한번이라도 우리는 찬찬히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정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찬찬히 살펴야하지 않을까.
소위 보수의 게임 방식은 딱지 붙이기, 피상화하기다. 거기엔 즉각적인 정서적 공감과 선동은 있지만 인간을 위한 사유는 없다. 세상의 속도는 사유라는 쉼표를 허락하지 않는다. 소위 보수는 그 속도를 더욱 가속화한다. 소위 진보도 그 속도 속에서 휩쓸려간다. 여기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장기판의 졸이나 말이 아니다. 여기 사람이 있다면 여기 정신이 있고, 철학이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고, 또 소망이 있을테다. 그 사람을 졸로, 말로, 포로 바라보기 전에 인간으로, 입체적인 실존으로 바라보는 사유의 호흡이 필요하다.
보수의 틀짓기.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내는 세상의 온갖 현상과 그 현상이 갖는 입체성을 평면화하기. 법 이전에 도덕을 이야기하는 한겨레, 경향, 그리고 소위 진보 몇몇 시민단체들. 문제는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수의 틀짓기'에 빠져 '우리끼리' 분열하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사람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관계, 그 관계의 총합인 사회라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세계, 그래서 다시 모순과 이율배반으로 둘러싸인 '인간'를 바라보는 시선을 단편화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자진해서 포기하는데 있다.
주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게임의 속도를 늦춰서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정치적 역학의 틀 속에서 스스로 자진해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가는 즉물화된 반(反)사유의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다. 어떤 인간을 타락으로 단정하기 전에 그 인간의 입체성을 고민어린 사유를 통해 재구성하고, 그저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고민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이어야 한다. 도덕적인 단죄나 법률적인 판단은 그 이후 일이다.
소위 보수나 진보로 자처하는 이들이 똑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많은 것을 진영의 논리와 정치적 역학를 고려한 전략과 전술의 눈으로만 사태에 대처하는 것이다.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
진정 '대안'을 추구한다면, 이 현실의 역학을 고려하면서도, 여기서 종종 놓치는 세밀한 삶의 결, 인간의 결을 읽어서 그 안에 깃든 고민과 고뇌로 공감을 확대해야 할 것이 아닌가? 질 때는 지더라도 무언가 다르게 보는 눈을 얻고 져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은연 중에 어떤 '희생의 메카니즘'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희생에 기대어 분노하고, 소위 '더 순결한' 분노와 저항이라는 전략과 전술을 위해서 '희생'을 당연시하거나 눈감지는 않는가? 이 '순결한 가학증'이 세상을 구원할까? 천만에. (출처)
- 주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