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시절에 최인호 작가의 로맨스 소설 "겨울나그네"를 읽고 다혜와 민우를 애틋하게
그려 보았었죠.
그 당시 겨울나그네를 읽은 사춘기 소녀들의 가슴엔 민우라는 이름이 마치 첫사랑의 이름
처럼 잘생기고 준수한 청년의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그리고 마침 그 때 방송된 드라마 "겨울나그네"에서 맑은 무공해 청년 민우 역에 손창민,
가녀리고 병약한 처녀인 다혜 역에 얼굴을 희고 핏기없이 화장한 탤런트 김희애가 나왔었고
열심히 한 회 한 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문득 떠올라 집에서 TV로 80년대에 개봉한 영화 "겨울나그네"도 찾아서 보았는데,
민우 역엔 강석우(그런 대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다혜 역엔 이미숙(정말 미스캐스팅
이구요 ㅋㅋ 왜냐면 다혜는 기본 병약한 청순가련형인데 젊은 시절의 이미숙은 너무나 튼튼하고
건강해 보이고 아무리 20대 시절이라 청순미가 있다 해도 소설 속의 다혜 이미지랑은 근본적으로 맞질 않아요)
, 둘 사이를 이어 주던 방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인물 현태 역할엔 안성기네요.
놀란 것은 안성기와 이미숙은 그 때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 때도 이미숙은 얼굴 볼살이 통통하니 젖살이 붙어 있긴 해도 둘 다 노숙한 얼굴이었고
둘 다 워낙 관리를 잘해서 지금도 그 때의 이미지와 외모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어요.
다시 보는 민우란 인물은 참 ....뭐라고 할 말을 잃게 만드네요.
대학 시절엔 준수하고 청순한 청년이었지만, 갈수록 그의 행보는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거기다 다혜에게 하는 행동은....ㅠㅠ 아버지의 병실을 찾아온 채권자에게 폭력을 휘둘러
감옥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후에 걱정해 주는 다혜 곁을 떠나 종적을 감춥니다.
어머니의 출신성분 때문에 괴로와하고 방황하다가 기지촌에서 자포자기하는 생활을 하면서
민우의 잘생기고 귀족적인 외모에 홀려 꽃뱀처럼 덤벼드는 제니에게 당해 같이 엮이고
동거하게 되고 , 밀수에 몸담다가 사람을 찔러 그 곳을 떠나 다혜에게 불쑥 찾아옵니다.
거의 6개월~1년여를 아무 연락없이 종적을 감추었다가 다혜 앞에 불쑥 나타나 옷을 사주고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물론 남녀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혜가 그 시절 보수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규수처럼 표현되어 있고 민우도 다혜를 정신적으로 구원의 첫사랑의 존재로
인식하니까요) 다음날 청순한 다혜의 의자에서 잠든 모습을 보고 자신이 더럽혀진 존재임을 깨닫고
경찰서로 자수하여 감옥으로 갑니다.
그런데도 다혜는 이 무책임하고 대책없는 남자를 사랑하고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그 옛날에도 이런 여성이 과연 있었을지.... 어찌 봄 바보같고 어리석고....
민우는 옛친구 현태가 찾아와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 옛날의 맑은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라고, 도와주겠다고 말해도 거부하고 말다툼을 합니다.
그리곤 세월이 또 흘러 어느 날 문득 현태에게 찾아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다혜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미 민우에겐 술집 작부 출신인 제니와의 사이에 첫아들도
자라고 있었죠.
어렸을 때는 그 당시 다혜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지 않은 현태가 비정하고 민우가 불쌍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현태가 너무나 당연한 태도였고 지 하고 싶은대로 막 살다가 바람불듯이 한번씩 불쑥
다혜를 찾아오거나 하는 민우의 모습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인 건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드네요. 물론 제니와는 몸만 같이 살 뿐이지, 마음은 항상 다혜를 그리워하고 생각한다지만
그것은 현실도피처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겨울나그네처럼 춥고 외롭게 방황을 계속하며 무너져가는 청춘 민우의 초상이, 그 당시 8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겪어내야 했던 청춘들의 모습을 빗대어 우회적으로 표현했다는 해석도 보았는데
새롭게 느껴지긴 하지만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