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 부인 김미경 교수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 의대 교수는 “남편의 도덕적 용기와 콘텐츠를 대선 후보로서의 자질로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조용하고 다소곳한 말투였다. 겸손하지만 단호하고, 강단 있지만 환했다. 무엇보다 웃음이 많았다. 안철수(55)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부인 김미경(54) 서울대 의대 교수를 만났다. 남편의 정치 입문 후 두 번째 대선을 치르는 소회와 대선 주자의 아내로서의 고충, 영부인이 된다면 하고 싶은 일 등을 물었다.
-내조활동으로 많이 바빠지신 것 같다. 광주, 인천, 속초, 서산 등 전국 방방곡곡 다니던데.
“아무래도 좀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더 많은 분들 뵙고…. 하지만 제약도 많다. 학교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까.”
-그간 모습 드러내기를 매우 꺼려한다는 느낌이었는데, 달라진 것 같다. 인터뷰도 많이 하시고.
“예전에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면 거절하지는 않았다. 다만 학교 일이 있다 보니 시간적 제약이 많았다. 총선 치르는 해에는 연가를 내서 도와야 했는데 그러고 나면 학교 일도 밀리고 학회 준비 할 것도 많고. 두 가지 일을 하다 보니 여유가 없었다.”
-2012년 첫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이 정치를 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는데.
“(웃으며) 예측이 틀렸다. 남편이 갑자기 창업할 걸 전혀 예상 못했던 거랑 마찬가지다.”
-늘 예상 밖 결정으로 아내를 놀라게 하는 나쁜 남편인가.
“그건 아니고.(웃음) 안랩을 창업한 것도 그때 우리나라에 IT 산업이 막 열리던 때 아닌가. 당시 컴퓨터 보안 문제는 아무도 해결하고 있지 않다며 본인이 맡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런 얘기를 들으면 설득이 된다.”
-IT 창업과 달리 정치는 가족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더 부담되는 건 사실이다. 모르는 세계니까. 하지만 결국 설득됐다.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땐 ‘지금 하는 일로도 충분히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데 꼭 해야 하나’ 했다. KAIST랑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였다. 그러자 우리 딸, 제자들, 그리고 청춘콘서트에서 만난 많은 젊은이들 얘기를 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 내가 나서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거들어야겠다’는 심각성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나라를 온전한 대한민국으로 다음 세대에 넘겨줘야 된다고 얘기했을 때는 더 이상 반대할 수가 없었다.”
-안 후보가 아내에게 많은 짐을 지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하던데. 실생활에서도 잘 표현하나.
“원래 말이 없는 편이다. 하지만 드러난다. 그럴수록 더 조심하게 된다. 남편이 너무 미안해 하지 않도록.”
-언제 그걸 느끼나.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는 제가 더 활동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사실 더 해야 하는데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남편한테는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사전에 상의를 많이 하나.
“안 한다. 신문 보고 안다.(웃음) 사실 나도 별로 알고 싶지는 않다. 결정할 때 이미 많은 분들 얘기를 들었을 테고 굉장히 복잡하고 힘든 상황일 텐데 아는 것도 없는 내가 함부로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신문 보다가 놀라거나 섭섭할 때 있지 않나.
“아니다. 다 읽어보면 옳은 말이다. 대개는 수긍이 된다.”
-너무 모범적인 답변이다.
“(웃으며) 그게 아니라,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섣불리 말하고 개입하는 것은 나도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잖나. 저는 많은 분들 만나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듣고 그걸 남편에게 전달하는 일이 잘 맞는다.”
김미경 교수가 서울대 의대 본과 3학년이던 1985년 한 학년 선배인 안철수 후보와 의대 캠퍼스에서 다정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안철수 후보 캠프 제공
-엘리트 부부라 그런지 다소 고지식하고 딱딱한 이미지가 있었다. 작년 총선 때 남편 대신 지역구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는데 의외였다.
“그런가?(웃음) 제가 교수였고, 그것에 대한 작지만 확실한 소명이 있다. 내가 병원이나 학교에서 전문가로서 열심히 기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모르고 사는 것도 교수로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학생들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남편 덕분에 공동체적인 삶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내가 배우는 거다. 총선 때는 남편이 당 대표로 전국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지역구는 내가 살펴야 했다.”
-지역 주민 반응은?
“좋아하신다. 바쁜데 왔다고 고마워하고. 제가 뭐랄까, 좀 치밀한 성격이라 지역구 지도에 간 곳, 안 간 곳 일일이 다 체크하며 다녔다. 공부하듯이.(웃음) 작년 총선은 지도에 색칠 안 된 데가 거의 없었다. 아무도 안 왔었는데 처음이라며 고마워하시기도 했다.”
-지지율 추이를 열심히 챙겨보시는 편인가.
“잘 안 본다. 가끔 주변에서 얘기는 해준다.”
-요즘 콘텐츠가 좋아졌다, 준비가 많이 된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
“저는 항상 그렇다고 생각했다.(웃음) 죄송하다, 이렇게 답해서. 요즘 말할 기회가 많아져서 그렇게 된 거고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확신이 생긴 건가. 요새 강철수로 불리는데.
“마음가짐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기업을 할 때도 ‘CEO라는 건 회사가 크기 위한 자양분’이라고 했다. 가족이 들으면 마음 아픈 얘기다, 사실. 거름이 되겠다고 하니까. 원래 한번 뭘 하겠다고 하면 그런 태도로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음가짐은 처음부터 준비돼 있었다고 본다. 다만 정치가 어떤 환경인지 익숙해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제 생각에는 굉장히 빨리 배운 것 같다. 학습능력이 뛰어나다. 금방 핵심을 파악하는 편이다. 내재돼 있던 확신을 이제 전체 문맥에 맞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싶다.”
1988년 4월 신혼여행을 떠났던 제주의 한 해녀상 앞에서. 안철수 후보 캠프 제공
-안 후보가 임상 아닌 기초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때 ‘이 사람은 노벨상을 받겠구나’ 생각했다던데. 남자의 매력 요소로 학습능력을 중시하는 것 같다.
“(웃으며) 정말 상당히 똑똑하다. 의대 진료봉사 다니며 사귀게 됐는데, 학교 선배 언니들이 화장실에서 ‘철수는 정말 천재야. 한번 보면 다 외워’ 그러는 거다. 2주마다 백과사전 두께의 책을 끝내는 코스가 있었는데, 한번 보면 완전히 기억한다는 거다. 진짜 그렇더라.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를 배울 때도 거의 모든 것을 독학했다. 가끔 데이트를 하면 90%의 시간을 헌책방에 책 구하러 다녔다. 사실 나는 컴퓨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열심히 책 표지도 보고 관심 있는 척하면서 따라다녔다.(웃음) 45세에 경영을 배우러 와튼스쿨로 유학을 갔을 때도 첫 학기에 또 우등생 명단 ‘딘스 리스트(Dean’s List)’에 들었다. 당시 김철수 안랩 대표가 추천서를 써줬는데, 추천한 학생이 공부를 잘한다고 학교에서 김 대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걸 보고 ‘여기서도 공부를 잘하고 있다’며 회사 사람들이 너무나 웃었다고 하더라. 그래서인지 머리가 크다. 굉장히 커서 맞는 모자 찾기가 힘들다.(웃음)”
-혹시 질투가 나지는 않나.
“아니다. 법에 대해서는 제가 훨씬 더 많이 안다.(웃음) 미국 법조계 사람들을 만나면 안 후보가 ‘김미경의 남편’으로 불린다.”
-무죄 판결이 나온 ‘리베이트 사건’이나 탄핵안 가결 날짜를 늦춘 데 대한 논란이 국민의당에 꽤 타격을 줬다. 그런 시기에는 어떤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나.
“표정을 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저는 그런 게 놀랍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뉴스를 안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를 정도다. 항상 그렇듯 본인이 당장 바꾸거나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는다.”
-그런 평정심이 한 개인으로는 미덕이지만, 정치인으로는 마이너스의 측면이 있다. 리베이트 사건의 경우 대대적으로 의혹이 일었던 것에 비해 무죄 판결은 잘 인지돼 있지 않다. 대중적으로 어필하는 소통감각, 홍보전략이 좀 취약한 것 아닌가.
“일리가 있다. 좀 다른 맥락일 수 있는데, 예전에 우연히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기자단 만찬을 하는 날인데, 농담도 많이 하고 흥겨운 파티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날 오사마 빈 라덴을 잡은 거다. 그 다음날 파티장에서 아무도 모르게 작전 회의를 귓속말로 한두 마디씩 하는 사진들이 나왔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나.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웃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핵심적 부분에 집중하면서 평정심 유지하는 걸 남편한테서 자주 본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단일화 후보를 양보했다. 그때의 결정이 큰 패착이었다고 후회하지는 않는지.
“남편이 ‘사퇴해야 할 것 같다. 단일화하기로 약속했는데, 저쪽에서는 그럴 생각이 없고 무조건 나오겠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저도 안타깝지만 수긍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후보 단일화로 정권교체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저도 남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순수하게 백의종군해 도와준 걸 거짓말로 왜곡하더라. 자꾸 선의를 악의로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들을 보면 심한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 면에서 아쉬움이 있다. 단일화 며칠 후부터 40회 이상 지역 곳곳에 지원유세, 공동유세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게 실은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까 최선을 다했다. 지금 와서 그걸 나쁘게 얘기할 수 있는 건가. 투표 후 미국에 간 것도 당선을 예상하고 자리를 피해준 거다. 저희가 무대에서 떠나준 거다. 투표 후 공항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투표율이 나왔는데, 당선이 확실하다고 한 수치를 넘어섰다. 당시 투표율이 오르면 반드시 이긴다고 했었다. 퇴장을 해 준 거다. 사실 우리도 마음이 많이 상해서 대학원 과정에 있던 딸이랑 가족끼리 마음 좀 추스리자는 여행이었다. 그걸 굉장히 나쁘게 말하면서 자기들 책임 회피하려는 것은 아무리 정치라도 이해가 안 되더라.(웃음)”
-그런 모습이 유약하게 보인 면이 있다. 그래서 요새 강철수 전략을 구사하는 건가.
“정직한 사람, 곧고 올바른 사람, 그런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 올바른 일을 원칙대로 하겠다고 하면 저는 굉장히 무서운 거라고 생각한다. 유약한 게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강하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책임지고 그만두고 하는 건 그게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진정한 사람의 강함이지 목소리만 크고 무조건 잡고 안 놓는 게 강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산 절반인 1,500억원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수평적 기회 나눔을 모토로 한 동그라미재단을 만들었는데, 잘 안 알려져 있다. 안타까워하는 지지자들이 많더라.
“실은 저도 좀 안타깝다.(웃음) 우리가 기부한 재산은 나중에 어떤 이유로든 재단 운영이 잘 안 되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환수된다. 진정한 의미의 기부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항상 ‘기업인 개인의 성공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사회의 지원으로 이뤄지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런 뜻에서 기부한 것이고, 재단은 우리랑 벽을 두고 있다. 자체 이사회 중심으로 운영된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안타까운 남편의 업적을 하나 더 홍보한다면.
“제일 가시적인 건 3김 이후 처음으로 그 정도 크기의 제3당을 만든 것이다. 한국 역사에서 3김과 안철수만 한 일이라고 하더라. 더구나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지지율로 제1 야당이 됐지 않나. 그것도 정치한 지 4년 만이다. 3김도 4~5년 만에는 안 됐을 거다.(웃음) 당연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또 국회의원으로서 입법한 것 중 좋은 것들이 정말 많다. 그 중 유난히 잘 안 알려진 게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원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이었던 것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였던 남편이 대승적으로 결정해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을 설득했다. 안 대표 생각으로는 어르신들께 꼭 드려야 한다는 거였다. 그걸 설득 못했으면 몇 년간 기초연금이 집행 안 됐을 거다. 어떤 분은 국회의원 그만두겠다고 할 정도로 심하게 반대했는데, 작년 총선에서는 40만원으로 두 배 인상한 금액을 공약으로 들고 나왔더라. 아무도 기억을 안 해주지만 당 사람들 설득하느라고 힘들었다.(웃음)”
1992년 딸과 함께 놀러 간 지인의 집에서. 안철수 후보 캠프 제공
-건조한 지식인 부부를 상상했는데 두 분이 의외로 유머의 합도 잘 맞는 것 같다.
“일도 많고 걱정거리도 많지 않나. 제가 불안해하는 기미를 느끼면 남편이 유난히 아재개그를 많이 한다. 그렇게 마음도 풀고 거기서 해법이 나오기도 한다. 제가 요즘 ‘아버지가 너무 유명한 정치인이라 딸 혼사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을 가끔 한다. 그러면 남편이 천연덕스럽게 ‘지금이야말로 설희가 진정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때다’ 그런다.(웃음)
예전 안랩 창업하겠다고 나섰을 때는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성적도 좋았는데, 의대 6년 그 고생을 해서 박사까지 받고는 다 쓸모 없는 걸로 만든다’고 속상해 했다. 그랬더니 ‘내가 의대 간 것은 설희 엄마와 설희를 만나기 위해 간 거다’ 그러더라.(웃음) 그러면 약간 ‘벙~’ 하면서 더 이상 뭐라고 말을 못한다. 여러 가지 일들을 겪다 보니까 서로 유머도 많아지고 혈맹이 돼가는 것 같다.”
-미국에 법 공부하러 유학 가실 때 딸을 데려갔다. 비싼 보딩스쿨에 보냈다는 말이 있는데.
“전혀 아니다. 조사해 보셔도 좋다. 주거지에서 다닐 수 있는 공립학교 다녔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안 보낼 이유도 없지 않나.
“지역에 있는 학교들도 충분히 괜찮은 학교들이었다.”
-스탠포드대에서 물리화학 박사과정 중인 딸도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였나.
“전혀 아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불러서 면담을 갔는데, ‘설희 어머니, 설희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할 거 같으세요?’ 물으시더라.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더니 ‘아주 못하는 편입니다. 왕수학 학원에 보내세요’ 하시는 거다. 그 당시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원이라며 추천해 주셨다. 학원에서 레벨 테스트 봤더니 역시나 제일 못하는 반이었다. 그랬던 애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에는 수학과 화학을 상당히 잘하고 좋아하게 됐다. 얘는 전형적인 이공계 학생이다.”
19일 열린 남편의 대선 출정식에서 포옹하고 있는 모습. 배우한 기자
-부부싸움도 하나.
“물론이다. 우리도 똑같다.(웃음) 가끔 건강하게 싸워야지.”
-누가 이기나?
“요즘에는 나한테 많이 미안해 하니까 일방적으로 내 목소리가 큰 것 같기는 하다. 졌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웃음) 예전에 교황님이 말씀하시길 ‘부부가 싸울 땐 접시가 날아다녀도 된다. 그 날이 지나기 전에 화해하면 된다’고 했다. 저희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
-화해는 빨리 하는 편인가.
“보통 다음 끼니 먹기 전에 되지 않나? 밥을 먹어야 하니까. 사실 제가 기계를 잘 못 다룬다. 리모컨 조작도 잘 못하고 조이스틱 같은 건 더 못 쓴다. TV 켜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한다.”
-서로 존대를 쓰는 이유는(김 교수는 인터뷰 내내 안 후보에 대해 말을 높였다).
“친정, 시댁 부모님 모두 서로 존대하신다. 결혼 전에는 ‘자기’라고도 부르고, 학생 때 ‘철수형’이라고 불렀는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자연스럽게 양가 부모님 따라 존칭을 쓰게 됐다. ‘설희 엄마’ ‘설희 아빠’라고 부른다.
-존칭을 쓰면서도 부부싸움이 되나.
“(웃으며) 된다.”
김미경 교수는 남편인 안철수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청소년들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보고 싶다”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미셸 오바마라는 독보적인 롤모델을 경험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영부인 역할에 대한 기대와 눈높이가 높아졌다. 어떤 영부인이 될지 생각해 봤는지.
“어휴. 아직 경선도 안 끝났다.(웃음) 아직도 먼 얘기지만, 저는 제 성격상 조용하게 제가 해야 할 바를 할 것 같다. 밝고 역동적인 미셸 오바마랑은 좀 다른 것 같다.”
-영부인이 되면 중점적으로 하고 싶은 일은.
“그 또한 앞서가는 얘기지만 제가 의사, 교수였고, 의학과 법학 연구자다. 또 엄마였고 딸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걸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에 아무래도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임할 것 같다. 우선 청소년들의 정신적ㆍ신체적 건강에 관심이 많다. 요즘 학생들이 몸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이 실내에서만 지내고, 컴퓨터나 스마트폰 속에서 살잖나. 그런 것들이 신체적ㆍ정신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된다. 그런 문제를 개선해 보고 싶다.”
-영부인이 된다면, 교수 일은 그만둘 생각인가.
“제 연구는 저한테 굉장히 중요하고, 저는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서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 어려서부터 꿈꿔온 삶이다. 하지만 영부인이 된다면, 자기 커리어가 더 우선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제 개인의 삶이 영부인으로서 역할과 책임에 앞설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두 개를 다 하려고 많이 애썼다. 정치인 부인이 아니었으면 연구도 더 많이 하고, 학회활동도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렇지만 이런 사회적 활동을 통해 여러 사람을 만나고 더 넓은 세상을 본 게 교수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둘 다 중요하다. 교수나 의사로서의 정체성이 저한테는 상당히 소중하다. 하는 데까지는 두 가지 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어떤 시점이 되면 저 자신이 앞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지 제일 오래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 세일즈를 한다면?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뽑으시면 미국의 오바마와 독일의 메르켈을 한꺼번에 얻는 거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아무런 스캔들 없이 열심히 일해서 퇴임시에 오히려 지지율이 올랐다. 도덕적 용기 덕분이다. 그런 모습에 메르켈의 컨텐츠가 더해진다. 제가 여자라 메르켈에 관심이 많다. 처음에는 말도 잘 못하고 옷도 좀 이상하게 입었다더라. 그러나 12년 동안 총리를 하면서 독일 사람들의 전폭적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2014년에 단기연수로 두 달 반 독일에 있었는데, 메르켈의 60세 생일에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축하하는 걸 봤다. 독일은 총리 생일도 챙겨주나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고, 메르켈을 너무 좋아해 처음 있는 일이라는 거다. 그때 만난 교수 중 한 사람이 ‘메르켈은 우리를 위해서 정말 소처럼 일한다’고 하더라. 다음날 해야 할 회의나 처리할 업무가 있으면 전날 다 준비를 해서 오고, 유럽연합(EU)을 이끌면서 어마어마한 여행을 다니며 격무를 다 이겨냈다. 그때 제가 막스플랑크연구소에 있었는데, 그곳 디렉터가 혁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 베를린에 가서 메르켈 총리에게 직접 전달한다. 사진 찍은 걸 봤다. 메르켈 총리가 직접 그 보고서를 받아 살펴볼 정도로 콘텐츠가 있다. 그 분이 우리 딸이랑 똑같이 물리화학자다.(웃음) 메르켈의 학습능력과 근면성실함, 일에 대한 윤리(Work Ethics). 누가 되더라도 그런 대통령이기를 바란다. 정말 일해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안 후보의 공약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정책은.
“학제개편 등 교육정책이 제일 좋다. 꼭 필요하다. 제가 학교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인적 자원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걸 늘 절감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게 인재양성을 해야 하는데 그 방향이 잘 잡혔다. 교육을 바꿔서 이미 들이닥친 어마어마한 경쟁의 물결을 치고 나가야 한다.”
-대통령에 당선될 것 같나.
“반드시 이번에 된다.(웃음) 마지막까지 굉장히 고생하기는 할 거다. 엄청난 일들을 겪어야 된다. 하지만 요동치는 가운데 마지막에는 결국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항상 그랬다. 우리가 겪은 모든 중요한 일들이 처음에 쉽게 된 적은 없었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 있다. 국민들이 남편의 진면목을 알아봐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그 집단 지성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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