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씨는 대통령 시민사회수석비서관 시절인 2004년 7월11일 제10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母親 강한옥 씨와 함께, 북한에 살고 있는 막내 이모 강병옥 씨를 만났다.
柳浩烈(유호열, 現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당시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2004년 7월4일 청와대 인터넷 신문고를 통해 “만약 북쪽에서 文수석을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라 생각하고 이모를 찾아내 상봉을 주선한 것이라면 이는 對南공작의 일환”이라며 “文수석은 북한의 전략에 응하지 않는 게 옳다”고 지적했었다.
文씨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 당시인 2004년 7월13일 남한으로 귀환 도중 북한 출입사무소에서 40분간 발이 묶이기도 했다. 이유는 북한이 보낸 생사 확인 回報書(회보서)에 없던 자신의 아들을 동반했기 때문이었다(2004년 7월14일자 <조인스닷컴>보도 인용). 이와 함께 당시 남측 상봉단에 포함됐던 조 모 씨는 ‘외사촌’이라고 속여 북한의 친구 안 모 씨를 만났다.
이 같은 이유로 북한은 回報書와 실제 방북 명단에 차이가 있는 ‘29가족 38명 전체를 대조해 봐야겠다’면서 귀환하는 남한 상봉단을 꼼꼼히 대조작업을 벌였다. 결국 文씨는 북한의 승인이 나기까지 대기해야 했고, 이들이 조사를 받는 동안 다른 이산가족들은 버스 안에서 초조하게 기다려야 했다.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남한의 가족은 수십만 명이고, 정부는 高齡(고령) 순으로 상봉자를 선정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文在寅 씨는 자신의 나이를 바꿔, 다른 상봉 대기자를 희생시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