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비문이란, 왕이 직접 쓴 비문을 말한다.
"아! 너의 근본이 굳세어서 갖추고 이루어 빈궁(嬪宮)이 되었거늘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지금 이 상황이 참 슬프고, 애통하고, 불쌍하구나. 평상시 화목하게 지냈건만 네가 나를 떠나 죽고 말았으니 너무 애달프고 슬프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나아가 느끼면 매우 마음이 아프다. 너는 문효세자의 어머니다. 네가 임신을 해서 낳은 아이가 문효세자이며 내 후계자다. 세자는 이미 두 살 때 글을 깨우쳤다. 너의 근본이 단단해서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다. 문효세자가 죽은 후 셋째가 되어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줄 알았건만 하늘과 땅은 오히려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았다. 이로써 마음 한 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나는 비로소 너의 죽음을 깨달았다. 어렵게 얻은 아들 문효세자를 하늘에 견주어 돌아오길 바랐으나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무릇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너를 데려 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써 느끼니 참 슬프고 애달프다. 앞전에 겪은 일과 비교해도 비교할게 없을 만큼 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 너는 진짜 이승을 떠나는구나.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아는 사람이다. 또 권세를 능히 삼가하고 도리를 지킬 줄 알고 나눌 줄 알았다. 너는 문효세자를 잃었을 때는 예를 다하며 울었고, 쉬지도 못했고, 눈물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너의 뱃속에 있는 아기를 위해서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네가 잘 못 될까봐 걱정 돼서 돌려 보냈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랗단 말이냐? 이제 나는 무릇 중요한 일을 접고 너의 장례를 치러서 살필 것이다. 문효세자의 옆에서 편히 쉬어라. 아들의 무덤에서 멀지 않게끔 아들과 어머니가 좌우에 있도록 할 것이다."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음력 7월 8일) ~ 1786년 11월 4일(음력 9월 14일) )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첫 번째 후궁이자 유일한 승은후궁으로 문효세자의 생모이다1753년 8월 6일(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고[4] 이름은 성덕임(成德任)이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였으며[5] 어머니 임씨는 통례원 종6품 인의로 재직한 임종의 맏딸이다. 1762년(영조 38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으며, 혜경궁이 거두어 곁에 두고 친히 길렀다고 한다.[6][7]
공교롭게도 이 해 음력 2월 2일, 정조와 효의왕후가 가례를 올렸으며 윤 5월 21일, 사도세자가 죽었다. 의빈(宜嬪)이 임오화변(壬午禍變) 이전에 입궁 했는지 이후에 입궁 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의빈이 입궁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그 해, 혜경궁 홍씨는 남편 사도세자(장조)를 잃고 살얼음판 같은 정국에서 세 자녀(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를 키워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의빈을 친히 길렀다는 점은 혜경궁이 의빈을 얼마나 아꼈는지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약 1766년(추정), 당시 세손이던 정조는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빈이 울면서 효의왕후가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며 죽음을 맹세했다고 한다. 궁녀가 승은을 거부하는 일은 죽음으로서 죄값을 치러야 할 큰 죄였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8]
정조는 의빈에게 처음 승은을 내리려다 거절당한지 15년 만에 다시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의빈은 또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시종을 크게 꾸짖고 벌을 내렸다. 다만 이번에도 의빈에게는 죄를 직접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한 연후에 의빈은 마침내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 정조가 지은 어제의빈묘지명(御製宜嬪墓誌銘)에는 ‘지금까지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둔지 20년이다.’[10]는 내용이 있다. 간행연도는 적혀 있지 않지만 1786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1786년을 기준으로 하면 정조는 1766년부터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뒀다. 그렇다면 정조는 1766년, 의빈에게 처음 승은을 내리려고 했다가 거절당했을 때부터 쭉 의빈을 마음에 뒀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의빈은 정조가 평생 동안 유일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한 여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첫째(문효세자)를 잃은 해에 셋째를 임신 한 채 사망이네요. 그러니 정조가 그 후에 후궁들에게 자식을 겨우 가졌어도 그리 마음이 가지 않았던 이유였던 것 같아요. 의빈성씨와 세 아이 모두 아쉽습니다. 정조도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