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준범 정치에디터석 데스크 jaybee@hani.co.kr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환대 속에 전국을 돌며 자신의 10년 유엔 총장 경험과 식견을 설명하러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공항철도 자동발매기에 지폐 두장을 몰아 넣는 장면은 그의 바람대로 “애교”로 넘어갔을 것이고, “나쁜 놈들”이 졸졸 따라다니면서 한-일 12·28 합의에 대한 입장을 묻고 또 묻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뉴욕에서 날아와 곧장 대선 링 위에 착륙했다. 사람들이 그를 유엔 사무총장으로 되새겨줄 틈은 전혀 없이, 정치권이라는 불구덩이 속으로 직행해버린 것이다. 그 뒤 열흘간 그가 보여준 건, 날카로운 통찰이나 세련된 매너를 갖춘 글로벌 리더의 모습과는 영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젊어서 고생해 성공한 꼰대’의 측면들만 부각됐다. 북악산 밑으로 어쨌든 가야겠는데 손에 든 것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뿐, 다른 준비물도 교통수단도 동승자도 못 정한 채 헤매는 모습이다. 그를 메시아처럼 기다려온 보수 진영 내부에서조차 “서글프다”는 한숨이 먼저 나오고 있다.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경우 남은 시간은 넉달 안팎. 반 전 총장은 과연 끝까지 달려서 벚꽃 휘날리는 결승점을 통과할 수 있을까.
우선, ‘중도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쪽의 얘기들. 반 전 총장이 완주할 것이라는 전망의 가장 큰 근거는 그가 유일한 ‘문재인 대항마’라는 점이다. 반 전 총장은 ‘최순실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 사태로 보수진영이 궤멸된 상황에서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맞서 20% 안팎의 지지율로 양강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반 전 총장으로 끝까지 밀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3월께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을 최종 결정할 경우, 그 이후엔 보수층의 결집력이 더 강해질 수도 있다. 또 반 전 총장이 조만간 특정 정당과 손을 잡고 현역 의원들이 대거 합류하면 체계가 갖춰지면서 검증공세 대응이나 메시지 관리에서도 지금과 달리 단단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세론’의 주인공인 문재인 전 대표가 허점을 노출하면서 판세가 흔들릴 가능성도 상존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주까지 넘어야 할 장벽이 훨씬 높다. 반 전 총장이 아무리 진영을 뛰어넘는 대통합을 외쳐도, 그가 ‘보수 후보’라는 점은 그의 지지층이 말해준다. 중도층으로의 확장 가능성이 그만큼 낮은 것이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커다란 국면에서 ‘문재인 때리기’의 파급력도 제한적이다. 무엇보다, 그가 내건 ‘정치교체’가 야권의 ‘정권교체’ 프레임을 뛰어넘기 어려워 보인다. 신년 여론조사들을 보면 국민의 80% 안팎이 정권교체를 원하고 있으며, <한국일보>의 15~16일 조사에서는 ‘반기문이 대통령 되면 정권교체로 볼 수 없다’는 응답이 62%로 나왔다.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 안에서조차 “이 난리를 만들어놓고 보수가 재집권을 하겠다는 건 염치없는 일”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참이다. 반 전 총장이 전략을 재정비하고 기술을 다듬어갈 수는 있겠지만, 민심의 저변을 뒤집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걸 극복하려고 반 전 총장 쪽이 최상의 시나리오로 그리는 게 반 전 총장을 중심으로 바른정당을 통합하고 더불어민주당·새누리당·국민의당 일부도 흡수하는 ‘빅텐트’ 전략이다. 쉽게 말해, ‘문재인 싫은 사람 다 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반 전 총장이 지금보다 강력한 지지율을 확보할 때 가능한 얘기다.
반 전 총장이 ‘제2의 고건’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 아직 예단하기는 어렵다. 지나온 열흘에 비하면 남은 시간과 변수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다만, 반 전 총장이 ‘대선에 떨어지더라도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출마한 이상 당선돼야지, 안 그러면 반 전 총장은 물론 국민들도 ‘자랑스러운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을 잃게 된다. 그의 완주 가능성이 아직도 ‘반반’인 이유다.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