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과 장봉군
며칠 전 내 페이스북 계정으로 친구 신청이 날아왔다.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무명 작가인 나한테조차 먼저 선뜻 친구 신청을 한 분은 ‘장봉군’이라는 낯익은 이름의 이용자였다. 한겨레신문에 시사만평을 그리던 바로 그 장봉군 화백 말이다. (이하 장봉군으로 칭함)
장봉군은 더 이상 한겨레신문에 만평을 올리지 않는다.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교체되지도 않는 이른바 무소불위의 원로권력을 수십 년 동안 만끽해온 유명 문학평론가 B모씨를 비판한 만평이 화근이었다. B모씨를 연상시킬 수 있는 해당 만평은 신문사 데스크의 편집 과정에서 무단으로 삭제되었고, 아마 이때의 충격과 배신감 때문이었는지 장봉군 화백은 회사에 휴직원을 제출했다.
그는 결국 회사를 퇴직했다. 장봉군이 떠난 자리는 노골적인 친문재인 성향의 후배 만평가로 채워졌고, 문제의 후배 만평가는 작년 봄의 20대 총선 정국에서 국민의당을 지지하는 호남 민심을 바람난 유부녀로 폄하하는 악의적 만평을 그림으로써 수많은 호남인들의 커다란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장봉군 화백으로부터 친구 신청이 있은 지 얼마 후, 페이스북의 “알 수 있는 사람” 기능에 이번에도 역시나 많이 들어온 이름이 등장했다. ‘김진’. 중앙일보에서 전격적으로 옷을 벗은 김진 전 논설위원 말이다.
김진 전 논설위원(이하 김진으로 호칭)의 급작스러운 퇴사는 적지 않은 소문과 억측을 자아냈다. 돌아가는 정황을 보면 그가 자발적으로 중앙일보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김진의 꼴통보수적 논조에 부담감을 느낀 중앙일보 고위층이 퇴사를 종용해 이뤄진 사실상의 해고일 가능성을 현재로서는 배제하기 어렵다.
김진은 거대 유력 신문사라는 든든한 배경막이자 성능 좋은 스피커를 졸지에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자기의 주장과 목소리는 계속 내야만 하겠기에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한 50대 가장이 불가피하게 치킨집을 개업한 것처럼, SNS 공간으로의 망명을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으로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평생 펜대만 잡아온 가늘고 하얀 손으로 굵은 닭다리를 튀기는 일이 쉽지가 않듯이, 기사를 일단 쓰기만 하면 중앙일보의 광대한 영업망으로 알아서 척척 유통시켜주던 호시절과 달리 김진의 글이 칭찬이든 비난이든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반향을 끌어낼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장봉군은 한겨레신문에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바쳤다. 창간 이래로 한겨레신문에서 생산해낸 걸작 만평들을 10개만 엄선하라고 한다면 그중 다섯 편은 박재동 화백의 작품이, 나머지 다섯 편은 장봉군 화백의 그림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은 장봉군의 투철한 양심과 뜨거운 정의감보다는 장봉군의 그림에서 신랄하게 공격받은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교체되지도 않는 늙은 문화 권력자의 풍부한 인맥과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이 더 절실하고 중요했다.
김진은 중앙일보에 우직하게 충성을 다했다. 김대중 정부가 강력히 추진한 역사적인 언론개혁 당시 사주인 홍석현 회장이 탈세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검찰청사 앞에서 “사장님 힘내세요!”를 볼썽사납게 외쳤던 몰지각한 기자들 무리에 혹시 김진도 들어있지 않았는지 나는 매우 궁금하다.
김진을 위시한 극우 논객들이 10년 동안 온갖 악담과 저주를 퍼부은 결과로 소위 민주정부는 10년 만에 끝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저 무능하고 게으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데에도 조중동 삼총사의 맹활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중앙일보는 김진을 더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김진에게는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가치이고 원칙이었지만, 중앙일보에게 보수 노선이란 시장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단순한 영업방침에 불과했던 탓이다.
김진은 보수를 목적으로 글을 썼다. 장봉군은 진보를 목표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김진은 보수가 수단인 자들에게 토사구팽을 당했다. 장봉군은 진보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 집단에 의해 용도폐기가 되었다. 둘 다 자신이 충직하게 몸담아온 진영에서 그야말로 숙청되었다. 수단으로 변질된 진보는 파시즘보다 수구반동적이고, 도구로만 악용되는 보수는 적색 테러의 대명사였던 크메르 루주보다도 잔인하고 위험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사건들이다.
장봉군과 김진 모두 자신들의 이름이 같은 글에서 오르내리는 데 대해 엄청난 짜증과 불쾌감을 느끼리라. 허나 나는 둘이 추구하고 지향하는 세상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으되, 동일한 방식으로 인생의 쓴맛을 봤다고 생각하기에 김진과 장봉군, 장봉군과 김진을 도매금으로 엮는 만행을 본의 아니게 저지르고 말했다. 내 필력이 모자란 까닭에 생긴 사고라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두 중년 사나이의 건투를 빈다.
그런데 김진을 평소에 그토록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해오던 대한민국 최고의 트위터 스타이자 세계적인 미학자인 J모씨는 본인과 친분이 두터울 손석희 JTBC 사장을 통해서라도 김진 복직운동을 벌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나는 중앙일보의 칼럼니스트 자리와 김진에 대한 인간적 의리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주저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의리를 선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페이스북 개발자 마크 저커버그에게 부탁 좀 하자. 왜 나한테는 늘 권력에게 단물 빨린 다음 억울하게 버림받은 사람들만 친구로 보내나? 이왕이면 시류에 영악하게 편승하고, 대장에게 아부 잘하며, 조직에서 줄 잘 타는 인간들도 이참에 좀 소개해줘라. 나도 한번 때깔 나게 출세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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