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하루가 지나갔다.
나는 박근혜가 물러나야겠다고 결심을 한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무엇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다.
설사 그가 내심으로는 사퇴 의사를 명확하게 굳혔다고 해도 그동안 쌓인 불신으로 인해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게다가 결백 주장에다가 개헌 요구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언사로 더 격렬한 불신과 반발만 불러왔다.
그 결과로 "탄핵으로 쫓겨나지 않고 자신의 의사로 물러나는" 최소한의 명예 퇴진 가능성도 사라지고,
즉각 퇴진 아니면 탄핵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었다.
1. 친박의 사망
박근혜의 담화는 "당신은 이미 죽은 목숨. 친박이라도 살려놓고 죽으라"는 친박의 요구를 대통령이 그대로 읊어준 것에 불과하다.
사즉생 생즉사라고 친박이 정말 살고 싶었으면 원래 언명했던 대로 "대통령의 명예 퇴진"을 위해 다른 해석의 여지는 일체 배제한 채 안정적인 헌정 유지를 위한 "질서있는 퇴진" 방안을 명확하게 밝히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놓고 대통령의 평화로운 퇴진을 주도한 세력으로의 입지를 노렸어야 했다.
그것마저도 생각대로 됐을지는 불분명하지만.
자기들 좀 살겠다고 개헌 요구로 해석될 수 있는 '임기단축'이라는 표현을 집어넣고,
'여야합의'라는 말로 자신들이 역할을 맡을 수 있게 한 것이 최악의 꼼수였다.
담화 후에라도 "명예 퇴진"이라는 이름으로 선한 의도를 강조했어야 했는데,
말 떨어지자마자 "개헌하자"를 떠드는 바람에 대통령의 담화가 꼼수였다는 사실을 스스로 떠벌이고 말았다.
이제 친박은 향후 정국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새누리의 재산을 둘러싼 내부투쟁만이 그들이 몸부림을 칠 수 있는 유일한 그라운드다.
2. 비박의 야당 포지션 획득
대통령 담화는 친박의 생명줄을 늘려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혜택은 비박에게로 돌아갔다.
비박은 탄핵의 당위성은 절박하게 느끼지만 새누리당 소속으로서 탄핵 의사를 명확하게 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였다.
민주당의 강공으로 탄핵의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어드벤티지도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담화 이후, <협상 추진 후 9일 이전 불발시 탄핵 의결>이라는 확실한 포지션을 취할 수 있게 됐다.
국회에서 결정해달라는 대통령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새누리당 소속으로서의 부담을 털어내고,
그것이 무산될 경우 마음껏 탄핵에 동참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이제 비박은 야당으로서의 포지션을 가지고 향후 정국 운영에서 나름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3. 탄핵 불발 가능성의 소멸
민주당이 탄핵 의결 시기를 2일로 잡든 9일로 잡든 비박의 참여 가능성은 확실해졌다.
의결 여부의 불확실성은 사라졌다.
헌재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들의 대통령 즉각 퇴진 요구가 몇 배는 더 명확해진 상황에서 탄핵을 기각시킨다면 향후 있게 될 개헌에서 헌재의 폐지까지 논의되는 존립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또한 관종 욕구가 아니라면 탄핵 심판을 길게 끌 이유도 없다.
탄핵이 의결된다면 속전속결로 심판을 진행할 것이다.
4. 질서있는 퇴진론
대통령 궐위시 60일 이내 대선 규정은 누구에게나 부담이다.
과거의 양김처럼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갖고 있는 정치지도자가 있다면 모를까,
최고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가 여론조사 지지도 20~25%선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는 대선이 졸속으로 치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가장 큰 수혜자가 될 문재인에게도 불행이고,
그냥 얼떨결에 대통령을 뽑아야 할 국민에게는 더더욱 불행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차기 정권이 안정적인 기반을 갖기 어렵다.
변변한 후보를 갖지 못한 다른 정치세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대선 시기를 6개월 정도 뒤로 잡고 역순으로 대통령의 사퇴 시기를 정하는 질서있는 퇴진론이 반드시 제기될 것이다.
대통령의 수락을 전제로, 제시된 일정을 강제할 수 있는 법적 조치가 이루어진다면 국민의 동의를 받을 수도 있다.
5. 즉각 퇴진 아니면 탄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있는 퇴진론은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당리당략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부담 때문에 힘을 얻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비박에서 이런 저런 구상과 제의를 할 것이지만, 민주당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를 능동적으로 진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60일 이내 대선의 부담과 당리당략 비난의 부담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재인-손석희 인터뷰에서 작게 확인된 "법대로 해야지 뭔 소리냐"라는 국민 여론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국회 결정 요구 부분에 대해 민주당은 완전히 무시하는 방침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비박은 성의 표시하는 것으로 만족.
국민의당 역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은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뭔가 입지를 확보하려고 깨춤을 추겠지만, 질서있는 퇴진의 가능성이 높지 않다면 국민의당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탄핵으로 시간을 버는 것 밖에 없다.
6. 탄핵 의결 후 대통령 퇴진
박근혜의 퇴진 의사가 분명한 것이냐의 여부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다.
만약 국회에서 일정을 정해주면 거기에 따라서 퇴진하겠다는 뜻이 진정이었다면,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된 직후 알아서 사퇴하거나, 이쯤에서 자진 사퇴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다른 조언 그룹의 역할로 사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저 탄핵을 면하고 임기를 하루라도 더 늘리고 싶은 꼼수가 어제 담화의 핵심 내용이었다면 의사결정 장애 상태가 탄핵 심판종료 시점까지 이어질 것이다.
결론
탄핵은 상수, 질서있는 퇴진론과 탄핵 의결 후 대통령 사퇴가 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