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시했고.. 한국내 극우세력은 미국에 잘보이려는 행동대원들인셈..
미국은 왜 사과 않하나?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의 책임을 물어 사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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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과 미국의 관계
그는 제주4.3이 발생한 원인으로 미국의 존재를 명확히 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4.3은 미국이 자신의 명령으로 발생된 행위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고 있을 때 발생했다. 그러나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대신에 미국 지도자들은 반란세력을 강경 진압할 것을 명령했고, 마침내 진압된 것에 만족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전까지인 1945~1947년 제주는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정은 육지의 공식 수뇌부를 지정한 반면, 제주민들은 자신들과 관련한 업무를 자체적으로 다루도록 했다. 그 결과 북한과는 어떤 중요한 연결 관계도 없으며 몇몇은 육지의 남조선노동당과 희미하게 연결된 좌파세력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며 “제주는 육지와는 대조적으로 1945~1947년 평화롭게 운영됐다”고 설명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John R. Hodge)가 1947년 10월 미 의원들이 내한했을 당시 제주에 대해 “국제공산당으로부터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은, 제주인민위원회가 평화롭게 통제하고 있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communal area)”이라고 소개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유해진 지사는 극우파 테러범과 함께 일했던 육지인들과 북한출신의 피난민들로 제주 경찰대를 꾸려 탄압을 가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당시 면 사무소 직원들은 유 지사에 아첨하는 정치꾼들로 채워져 직접 식량배급을 통제했다. 1947년 비인가된 곡물수집량은 공식 수집량의 5배에 달했다”고 밝혔다. 보다 못한 미군 조사관이 유 지사를 해임할 것을 미군에 요청했지만 윌리엄 F. 딘 장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규모 4.3학살로 상황이 악화되는 과정을 미국은 사실상 묵인·방조한 셈이다.
당시 서울 검찰관을 맡은 원택윤은 “좌파세력 선동이 아닌 공권력의 무능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고,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반란이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경찰의 탓”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브루스 커밍스는 이런 과정 속에서 “미국은 진압 감독, 반란 진압군 일상훈련, 수감자 심문 및 게릴라 세력을 찾아내기 위해 미군 탄착 관측기 사용 등의 방식으로 반란 진압에 직접 가담했다”고 강조했다. 1948년 미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은 ‘게릴라 단체들로부터 해안 마을을 보호하도록 무기 소지 폭도를 체포 및 무고한 시민에 대한 살해와 위협을 근절한다는 확실한 임무를 경찰에 지시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국 공식 자료에서는 1만 5000명에서 2만명의 제주민이 사망했다고 1949년 보고했고 한국 정부의 공식 수치는 2만7000여명으로 보고된다. 그러나 당시 제주지사는 6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4만명이 일본으로 피난갔다고 미 정보국에 은밀히 전달했다”며 “공식적으로 3만9285채의 집이 붕괴됐지만 도지사는 ‘언덕 부근에 놓인 집 대부분’이 사라진 것으로 봤다. 실상은 400개 마을 중 170개만이 남아있다. 결국 5~6명 중 1명의 주민이 살해되고 절반가량의 마을이 파괴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은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 "내란 당시 사망한 공산당 동조자들 친인척이 5만명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 내 체제 전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결국 4.3 학살의 시작부터 예비검속까지 미국이 깊숙이 개입돼 있고 극우파 세력이 행동에 나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