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몽로의 음식에는 어떤 역사적 의미를 담으려고 하고 있나?
= 내 음식에 역사성까지 담아보진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은 담으려 한다. 대자본이 생산하는 재료는 안 쓰겠다거나, 닭은 협동조합이 생산하는 닭만 쓰겠다고 한다면 이런 게 정치성이다. 서양에서 사오는 육계의 기준이 아닌 우리나라 닭으로만 팔겠다는 건 사회문화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런 걸 내가 깊이 있게 고민해보거나 실천해 보지는 못 했지만, 거기에 정체성이 있으면 담보해보려고 한다.
- 몽로의 치킨요리가 유명한 건 그런 고민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를 담고 있는 또 다른 요리가 있나?
= 소 내장요리를 하는 것 자체도 의미가 있다. 양식당에서는 원래 소 내장요리를 하지 않는다. 예전에 귀족들과 왕족들, 부자들이 소고기 등심스테이크를 먹을 때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버린 내장을 주워서 요리해 먹었다. 그러면서 맛있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나중에는 조리법이 개발된 것이다. 내가 그 조리법을 배워서 한국에 와서 팔 때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첫째, '서양요리는 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의 서민요리를 우리도 맛 볼 즐거움을 나눕시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둘째,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 내장요리가 서양에도 있다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의 창작요리들에는 내가 독점적인 요리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우리 가게를 찾는다는 자본주의적 욕망도 담겨 있다. 이처럼 요리 하나에도 많은 것이 결합된다.
- 그렇게 보면 음식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역사가 있는 것 같다.
= 4.3항쟁 터지고 나서 그 땅에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또 제주도에 먹을 것이 너무 없어서 일본으로 넘어간 제주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징용 끌려갔다 한국에 못 오고 일본에 눌러 앉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재일동포 사회를 구성했다. 그 사람들이 일본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불고기와 소 내장요리를 파는 것이었다. 원래 고기 먹는 법을 몰랐던 일본인들에게 한국식 불고기가 전파되어 일본의 야끼니꾸가 되었고, 일본인들이 냄새나서 버렸던 내장을 얻어 와서 조리해서 판 내장요리가 일본의 주요리가 되었다. 일본의 야끼니꾸와 내장요리는 지금 엄청 비싼 요리들이다.
(중략)
- 우리나라의 대표음식이라고 할까. 한식세계화를 정부 차원에서 추진했지만,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음식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 한식세계화라는 발상 자체를 거부한다. 왜 우리 것을 내놓아야 하나. 그 사람들이 찾아서 먹다보면 무엇이 맛있는지, 무엇이 국제적인 감각에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한식의 세계화는 외국인이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음식을 먹거나 외국 현지에서 먹고, 그것이 자체적으로 분화 확장되고 진통을 겪으면서 성장하든지 쇠퇴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국가적으로 어떤 것을 해줄 게 있다면, 그것을 보고 즐거워해주는 것에 그쳐야 한다.
- 정부의 한식세계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인가?
= 그렇다. 정부가 한식세계화 추진단을 만들어 세금 쓰는 것에 대해 청문회를 열어 막아야 한다. 청문회를 열어 책임자를 구속하고 예산낭비에 눈감은 공무원은 징계해야 하는데, 그런 걸 하나도 안 했다. 청문회를 열자고 말만 하고 열지 않았다.
한식세계화로 인한 수많은 오류의 발단이 거기에 있다. 이것은 4대강 문제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인식이 없다. 야당도 이해가 굉장히 부족하다. 한식세계화라고 하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방식만 바꾸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식세계화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못한다. 세계화에는 반대하는 진보 정치인들이 왜 한식 세계화는 찬성하나?
(중략)
- 한식세계화가 이뤄지면 좋은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는데...
= 한국이 더 알려지는 계기가 되면 우리나라에 나쁜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묻는다면 굉장히 복잡한 문제가 된다. 그것이 나에게 좋은 것이냐 묻는다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을 안 해봤다.
그걸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있다. 한식을 외국인이 모른다고 우리 삶이 치명적인 피해를 받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 한식세계화를 국익이라는 모호한 말로 포장하는 게 난 이상했다. 우리나라는 전제주의, 전체주의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다.
(중략)
- 몽로에서 요리를 하며 지내는 하루하루가 행복한가?
= 행복하지 않다. 생존하려고 일하는데 뭐가 행복하겠나. 즐거움은 다른 데에서 찾는다. 아침에 와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 끝나고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일로써 즐겁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다 뻥이거나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것 같다. 상황에 따라 그런 느낌이 올 뿐이지, 인생은 고행이고 일이 고(苦)의 핵심인데 새끼들 먹여 살리려고 새벽에 나와서 일하는 게 뭐가 즐겁겠나. 놀고먹는 게 즐겁지, 일은 하나도 안 즐겁다. 이 내용은 꼭 써 달라.
- 그래도 일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 냉정하게 직시해보면, 일은 행복하면 안 된다. 일이 행복해지면 종교가 된다. 그러면 남에게 강요를 한다. 행복이 있으니 하루에 20시간 일하라고 한다. 그런 이데올로기는 박정희시대의 산물이다. 일은 즐겁고 행복하다는 관념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일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절대 행복하다고 안 한다. EBS의 <극한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사람들은 힘들어 죽으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대로 체험하지 않고 쓰면 '쇳물이 뻘겋게 녹을 때 도공의 얼굴엔 행복의 미소가 번진다'는 식의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저거 만들었는데 깨지면 어쩌지, 이번에 못 팔면 어쩌지' 이런 생각들을 한다. '기계작업을 거부하고 굵은 땀방울을 흘린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래야 비싸게 팔 수 있어서 하는 것이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기계로 해서 비싸게 팔 수 있으면 기계로 만들지 미쳤다고 발로 돌리겠나. 어쨌든 일은 괴로운 것이고 그래야 정석이다.
선진국의 핵심은 일을 덜 하는 데에 있다. '일을 덜 하고도 행복하다'가 아니라 '일을 덜 하니까 행복'한 것이다. 스웨덴 요리사는 안 힘든가? 스웨덴 장거리 트럭운전사는 안 힘든가? 그들도 힘들다. 하지만 이태리 사람들은 8시간 쉴 때 그들은 16시간 쉬니깐 행복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애들하고 놀고, 와이프와 여행 가고, 그런데 나라에서 놀라고 돈을 더 주니 행복하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