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절이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퍼왔습니다.
호흡 길게 천천히 글을 음미하며 읽으실 분은 처음부터 읽으시고,
일단 결론부터 알고 싶으신 분은 맨 아래 문단 읽으시면 돼요.
글 쓰신 시간이 어제 오전 1시 58분. 이 나라 걱정에 잠도 못 이루고 글을 쓰고 계셨나 보네요.
마음이 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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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승강장에서 바삐 지나던 사람이 시각장애인을 밀칩니다. 시각장애인은 철길로 떨어져 다리를 다칩니다. 기차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오는 와중에 한 사람이 철길로 뛰어들어 시각장애인을 부축해서 함께 올라오려 합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이 다리를 다친 터라 올라오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승강장에서 손을 내밀어 그들의 손을 잡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손 내민 사람의 허리를 잡아줍니다. 어떤 사람은 그들에게 힘내라고 응원하고 어떤 사람은 역무실에 전화 걸어 기차를 정지시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못 본 척하고 제 갈 길 갑니다. 개중에는 "장님이 뭐하러 철길 가까이에 섰다가 떨어지나? 저 인간 때문에 기차가 제 시간에 못 떠나잖아."라며 시각장애인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차 승강장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표준형 인간’은 누구일까요?
어제 역사학계 원로와 역사학회들이 ‘건국절 제정은 친일세력의 역사 세탁’이라는 취지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돌격대를 자처한 새누리당 의원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추진한 뉴라이트의 목적은 좀 더 근본적인 곳에 닿아 있습니다. 그들이 상정하는 표준적 인간은 ‘자기 이익을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입니다. 그들은 이런 ‘사익 추구형 인간’이 시장을 확대시키고 경제를 성장시키며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정의를 위한 투쟁’이나 ‘약자에 대한 연대’ 등은 사회를 혼란시키고 시장 질서를 교란함으로써 역사 발전을 지체시키는 부정적 요소입니다.
“독립운동은 건국에 실제로 기여한 바 없다.”는 주장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발전시킨 주역은 일제 강점기에도, 미군정기에도, 정부 수립 후에도, 묵묵히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한 사익추구형 인간들이다”라는 인식에 기반합니다. 그들의 인식체계 안에는 정의와 불의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판단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문제조차 시장논리로 해석하려 듭니다. 그렇기에 ‘종군위안부는 돈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원한 창녀’라고 생각하는 거죠.
떨어진 시각장애인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철길로 뛰어드는 세상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철길로 뛰어드는 사람을 ‘의인’으로 칭송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압도적 다수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겹고 더러워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살만하다고들 생각했습니다. 투옥과 고문을 각오하고 독립선언을 한 사람들 덕에,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립선언’이 온 민족의 결연한 의지에 따른 것임을 내외에 선포한 사람들 덕에, 대한민국이 건립되었다고 선언한 것이 현행 헌법정신입니다.
뉴라이트의 ‘건국절’ 제정 주장은, 대한민국 건립의 진정한 주역을 자기 사익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의인’들에서 자기 사익만을 추구한 사람들로 바꾸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정의감이나 연대의식 등은 무의미해지고, ‘사익추구형 인간’들은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다는 비난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표준’을 넘어 ‘모범’으로 승격됩니다. 정의, 도덕, 윤리 등과 관련한 판단이 배제된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들로 가득 찬 사회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대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사회입니다. “민중의 99%는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 주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나향욱의 발언은, 이런 생각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건국절’ 제정은 ‘역사세탁’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건, ‘불의에 저항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 '현재의 기득권자들이 영구히 권익을 누리는 사회'를 건설하고야 말겠다는 ‘미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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