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에 아이를 가둬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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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군데 발췌하면...
독서를 강조하는 건 보수든 진보든 다를 게 없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많이 읽히자는 공통된 지향점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게 초(超)조기교육 현상으로 이어진다. 본래 조기교육의 필요성은 미국에서 먼저 거론됐다. 소득·계층별로 학력 격차가 너무 벌어지다 보니 최소한 글은 떼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끔 조기교육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 와서는 ‘울트라 얼리 러닝’ 내지 ‘하이퍼 얼리 러닝’ 양상으로 바뀌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언제부터인가 ‘독서 영재’라는 말도 등장했다. 태어나서 만 25개월까지 1만 권가량의 책을 읽었다는 민지(가명)였다. 그런데 독서 영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민지를 찍은 동영상을 들고 미국의 독서 수업 전문교사(리딩 스페셜리스트)들을 만났더니 대뜸 하는 말이 '누가 아이한테 이런 짓을 시키나요?'였다. 아이를 데리고 당장 병원엘 가보라고도 했다. 반신반의하며 민지 엄마를 설득해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민지는 영재는커녕 지능발달 지체 상태라고 했다.
애착에도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민지는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 책을 읽었는데도 애착 반응 검사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담당의는 민지에 대해 '동물원에서 쇼 하는 동물들과 비슷한 상태'라고 말했다. 돌고래가 묘기를 부리는 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다. 사육사가 원하는 대로 행동이 통제된 것이다. 아이들 또한 주 양육자가 좋아하면 그 행동을 반복해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사랑받으니까. 민지도 그랬던 것이다. 민지에게는 유사 자폐 성향이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초(超)독서증’ 내지 ‘과잉언어증’으로 해석되는 하이퍼렉시아(Hyperlexia)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하루 종일 꼬맹이가 책을 붙들고 중얼거리고 있으면 의사들은 하이퍼렉시아를 먼저 의심한다.
영어 영재로 소문난 남자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폭력 성향이 강해지면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 엄마는 어려서 외국어에 노출돼야 바이링구얼(이중 언어 구사자)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하루 종일 영어 비디오를 켜놓았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결코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아이의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이는 비디오를 보는 동안 아마도 속으로 ‘엄마, 나를 제발 좀 안아주세요’라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이런데도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영어를 따라 하면 대단해 보이시나? 이건 인간의 뇌를 인공지능처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의 지적 능력만을 강조하는 이런 교육은 집어치워야 한다. 나는 과격하게 말하곤 한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라고. 특히 열두 살 이전 아이들에게는 독서를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아이가 글씨를 줄줄 읽으면 뭐하나. 이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능력이 향상되다 보면 리딩의 최상 단계, 곧 읽는 내용을 분석하고 유추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생물학적 뇌 발달로 볼 때 이건 열여덟 살쯤 돼야 가능하다. 이때부터야 비로소 제대로 된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책은 아이들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과격하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읽히지 말라는 건 아니다. 영상을 주로 접한 아이에 비해 텍스트를 주로 접한 아이가 더 풍부한 상상력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거실을 서재로 만드는 등 유난을 피우면서 부모가 독서를 감시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아이가 글씨를 지겨워하면 책에 있는 글씨에 전부 검정 테이프를 붙여버릴 수도 있다. 대신 그림만 보면서 그와 관련된 부모의 경험을 들려주시기 바란다. 책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책에 아이를 가두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