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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밤 아이들은 강간당하고..상처에서 구더기를

강제수용소 조회수 : 3,473
작성일 : 2016-04-30 09:17:15

부산 형제복지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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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안의 지옥:  수년간 아동들이 매일 성폭행을 당하고, 상처에서 구더기를 골라내야 했고, 

수용자들이 고문당하고 맞아 죽는 것을 봐야했던 ‘악마’같은 한국의 강제 노동수용소.


검정색 교복을 입은 14세 소년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경찰관이 추궁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려 신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최승우 씨는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경찰관은 소년의 바지를 잡아내리고 생식기 가까이에 라이터 불을 켜서 최 씨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게 했다.


그런 다음 곤봉을 든 두 남자가 와서, 현대 한국사에서 최악의 인권 유린이 행해진 산비탈의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으로 최 씨를 끌어갔다.

 

1982년 그날 밤, 최 씨는 기숙사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렇게 당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 노동과 거의 매일의 폭행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5년의 세월이 시작됐고 최 씨는 폭행으로 사망하는 남녀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그들의 시체를 보았다.

 

최 씨는, 당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한국이 현대적 국가로서 국제적 검증을 받게 될 기회로 보고 그 개최에 앞서 거리에서 치워버린 수천 명의 노숙자, 취객,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와 장애인들 중 한 명이었다.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문서들, 그리고 수용시설 관계자 및 전 수감자들과의 수십 차례 인터뷰에 근거한 AP통신의 조사는, 이와 비슷한 수십 개의 수용시설 중 최대 규모인 형제복지원에서 소위 부랑자에 대한 학대는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잔학하고 광범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부 최고위급에서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아무도 형제복지원 수용시설 내의 성폭행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진 적이 없다.

 

앞선 두 번의 수사 시도는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들 관료들은 그 후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했으며, 한 명은 현 집권당의 상임고문으로 있다. 형제복지원에서 노예노역으로 만든 제품은 유럽과 일본, 그리고 아마 그 외 다른 나라들로 수출됐고 수용시설을 소유한 가족은 불과 2년 전까지 복지시설과 학교를 계속 운영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2018년 개최될 한국의 두 번째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아직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수천 명의 전 원생들은 여전히 공개적 인정이나 사과는커녕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지금 목소리를 내는 몇몇 피해자들은 새로운 수사를 원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사건의 재조사를 거부하며, 증거가 너무 오래됐다는 이유로 야당 의원의 재수사 요구를 막고 있다.


안정태 한국 행정자치부 과장은 하나의 인권유린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정부에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주고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안 과장은 또한,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들은 2000년대 중반에 과거의 잔혹 행위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한시적 피해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사건을 제출했어야 했다며, ‘각 사건에 대해 별도의 법을 제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 원생들은 잊지 못한다. 한 피해자는 몇 달 동안 국회 앞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침묵의 일인시위를 벌였다. 최 씨는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고 지금은 매주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정부는 당시 있었던 일을 지속적으로 은폐하려 시도해왔다. 어떻게 정부와 싸우겠는가? 만약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누가 들어줄까?”고 그는 묻는다. “나는 우리 이야기를 꼭 하고자 눈물로 호소한다. 제발 우리 말을 들어달라.”

 

한때 보육원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전성기에는 20개 이상의 공장을 운영하며 무급으로 원생들을 착취해 목재, 철재, 의류, 신발, 그리고 기타 제품을 제조했다.

 

남부 항구도시 부산에 여러 채의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진 형제복지원은 높은 담을 세워 외부의 시선을 차단했고 경비원들은 목봉과 경비견을 끌고 다니며 감시했다.

 

담장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은 한국의 현대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당시 한국은 40년에 가까운 일본의 식민지배에 이어 50-53년의 한국전쟁의 황폐함에서 아직 회복 중인 시기였다.

 

1960년대로부터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80년대까지 한국은 경제 발전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했던 군사독재자들이 지배했다.

 

1975년,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은 거리에서 부랑자들을 없애고 ‘정화’시킬 것을 경찰과 지역 관료들에게 지시했다.


경찰은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걸인, 껌이나 잡동사니를 파는 잡상인, 장애인, 길을 잃었거나 혼자 있는 아이들, 그리고 반정부 유인물을 갖고 있던 대학생을 포함한 반체제인사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은 전국의 36개 수용 시설에 감금됐다. AP가 입수한 정부문서에 따르면, 1986년에는 수용 인원이 오년 전 8,600명에서 16,000명으로 급증했다.


거의 4,000명이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하지만 그중 90% 정도는 정부가 정의한 “부랑자” 범주에 들지 않는, 그래서 그곳에 수용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전 검사 김용원 씨가, 형제원 기록과 또한 정부 관계자들이 수사를 중단시킬 때까지 자신이 행한 심문을 토대로 AP통신에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 규율을 집행하던 인물의 보조로 일하며 내부를 접할 특별한 기회를 가졌던 이전 원생, 이채식 씨에 의해 형제복지원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운영됐는지가 밝혀졌다. AP통신은 정부문서 열람을 통해 이제 46세가 된 이 씨가 밝힌 다수의 세부 사항이 사실인지 독립적으로 검증했다.


이 씨는 13살 때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켜 형제원에 보내졌다.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의료반이었다. 의료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이 씨와 다른 네 명은 하루에 두 번씩, 살균제를 상처에 바르거나 족집게로 구더기를 집어내는 식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환자들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며 이 씨는 “그건 지옥 안의 지옥이었다. 환자들은 그냥 죽게 방치됐다”고 말했다.

 

힘이 센 원생들은 힘이 약한 자들을 강간하고 때리고 음식을 빼앗았다고 그가 말했다. 의료실의 경비원에게 강간을 당한 후 이 씨는 자살을 시도했다.

 

1년 후 이 씨는 경비대장 김광석의 보조로 일하게 되는데, 김광석은 형제원의 다른 경비원들과 마찬가지로 원생으로 들어왔다가 원장에게 충성심을 보여 권력을 쥐게 된 사람이었다. 많은 원생은 그를 수용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AP통신은 김 씨의 행방을 여러 차례 추적했으나 알아낼 수 없었다.

 

이 씨는 작고 다부진 체격에 햇볕에 그을은 김 씨가 거의 매일 수용소의 “교화실”에서 원생을 죽도록 두들겨 팰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씨는 김 씨가 하루에 두 번씩 원장에게 환자와 사망자 수를 보고하러 갈 때 그와 함께 갔다; 매일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다.

 

이 씨는 작고 다부진 체격에 햇볕에 그을은 김 씨가 거의 매일 수용소의 “교화실”에서 원생을 죽도록 두들겨 팰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이 씨는 김 씨가 하루에 두 번씩 원장에게 환자와 사망자 수를 보고하러 갈 때 그와 함께 갔다; 매일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다.

 

어느 날 아침, 김 씨는 전날 밤 또 한 명의 원생이 구타로 숨졌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해 조깅을 하고 있던 원장 박인근에게 다가갔다. 이 씨는 박 원장이 시체를 담장 바깥쪽 언덕에 묻으라고 지시하는 것을 들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폭력은 일정 부분 노예노역에 의존한 대규모 돈벌이 작업의 비호하에 일어났다.

 

공장들은 표면적으로는 원생들의 직업훈련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AP통신이 부산시로부터 단독으로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1986년 말까지 형제복지원은 그들 중 11개의 공장으로부터 이윤을 남겼다.

 

문건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확인되지 않은 기간 동안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노동을 한 데 대해 1,000명 이상의 원생에게 현 시세로 170만 달러를 지급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 검사에 따르면 시설 기록과 당시 원생과의 인터뷰 결과 거의 4,000명에 이르는 원생들이 무임금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당시의 또 다른 조사는 -정부에 의해 신속하게 폐지되긴 했지만- 인터뷰를 한 100명가량의 원생 중 ‘거의 아무도’ 돈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AP통신이 인터뷰한 20명의 이전 원생들 중 누구도 형제복지원 수용기간 동안 돈을 받지 못했으나, 그중 세 명은 후에 약간의 돈을 지급받았다.


성인들은 형제복지원 안팎의 건설일에 투입됐다. 아동들은 때로 흙을 나르거나 담쌓는 일을 했으나 대부분은 볼펜과 낚싯바늘을 조립했다.


몇 가지 상품은 다른 나라와 연계돼 있었다. 예를 들어 박인근 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내 재봉공장에서 만든 와이셔츠는 유럽으로 보내졌으며, 1980년대 미국이나 다른 주요 시장에 의류를 수출하던 주요 회사인 대우의 직원들이 원생들을 교육시켰다.


소유주인 박 씨는 파트너쉽을 제안하기 전에 대우 간부들이 공장시설을 둘러봤다고 회고했다. 대우 인터내셔널의 김진호 대변인은 당시 기록이 없어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1970년대 수용됐던 원생들은 일본 수출용으로 포장에 일본어가 적힌 상품에서 낚싯줄을 후크에 매는 작업에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형제복지원에 8년 동안 수용돼 있었던 김희곤 씨는 1970년대 초 일본에 보낸 상품 중 하자가 발견됐거나 후크가 빠져 있어 수천 개가 반품되자 그와 동료들이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1975년부터 1980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박경호 씨는 1970년대에서 80년대 사이 미국과 유럽에 신발을 제조 수출했던, 지금은 없어진 국제상사의 로고가 붙은 운동화 밑창을 기억했다.

 

원생들은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익을 얻었기에 이 일은 번창했다.

 

지방 관료들은 부랑자들을 수용할 수용시설이 필요했고, 따라서 이들은 매년 형제복지원과의 계약을 갱신했고, 이를 위해 원생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복지원의 재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해 복지원을 감사할 필요가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원생 숫자에 따라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았으므로 더 많은 원생을 붙들어오도록 복지원이 경찰을 압박했음을 초기 조사는 밝혀냈다. 그리고 경찰관은 얼마나 많은 부랑인들을 잡아들였냐에 따라 승진을 하곤 했다.

 

두 명의 부산시 관계자는 형제복지원이 30년 전 폐쇄됐기에 이 같은 사실들을 확인해주기 어렵다는 말만 했다. 부산경찰청 허귀영 대변인도 같은 이유를 들어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소유주 박 씨는 사회복지 공로를 인정받아 두 개의 국가훈장을 수여 받고 정부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리고 그의 자전적인 스토리는 ‘밑바닥 인생’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영웅적인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1985년의 텔레비전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졌다.

 

박 씨는 횡령 혐의 및 비교적 가벼운 다른 혐의로 짧은 기간 옥살이를 했지만 형제복지원에서의 가혹 행위로 처벌받은 적은 없다. 마침내 1987년 수사관들이 형제복지원을 압수수색했을 때, 수사관들은 박 원장의 사무실에 있는 저장고에서 현시세로 500만 달러에 이르는 미화 및 일본 화폐, 그리고 예금증서들을 발견했다.

박 씨는 자서전과 법원 청문회,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부인했고, 자신은 정부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가족, 친구, 활동가들을 통해 그를 접촉하고자 계속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AP통신은 형제복지원에서 2인자로 불렸던 임용순을 찾아냈고,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형제복지원이 부패, 폭력, 노예노동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것에 분개했다.

박 원장의 처남이며 호주에서 목사로 활동 중인 임 씨는 박 원장이 거리의 말썽꾼들을 없애 부산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헌신적인’ 사회사업가라고 주장했다. 임 씨는 또 형제복지원 폐쇄가 ‘국익을 해쳤다’고 주장했다.

임 씨는 형제복지원 내에서 구타사망 사건이 있었음은 인정했지만 이는 원생끼리의 싸움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복지원의 높은 사망률은 원생들 다수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 상태가 나쁜 상태로 복지원에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임 씨는 ‘그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었을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입소 둘째 날, 최 씨는 전날 잔혹한 강간으로 여전히 멍한 상태에서 다른 원생들과 함께 옷이 벗겨지고 씻겨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경비원이 한 여성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간 다음 머리에 피가 날 때까지 곤봉으로 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46세인 최 씨는 “난 그저 거기에 서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소대장이 그날 오후 다시 날 강간할 때도 난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 한 번은 7명의 경비원들이 소리를 지르는 한 남성을 쓰러뜨려 그에게 파란 담요를 씌우고 발로 짓밟고 때리는 것을 봤다고 최 씨는 회상했다. 피가 담요 밖으로 스며 나왔다. 담요가 벗겨지자 죽은 남성의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

형제복지원이 제공한 사망자합계에 따르면 1975년과 1986년 사이에 513명이 사망했다고 하지만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높았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 간부들이 탈출에 대한 우려 때문에 거의 사망에 이르게 될 때까지 사람들을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고 말한 다수의 원생들을 인터뷰했다.

‘형제복지원은 박인근의 왕국이었고 폭력은 그의 통치 방법이었다’고 김 검사는 형제원 소유주에 대해 말했다. ‘사람이 매일 맞아 죽어 나가는 곳에 갇혀 있다면, 강제노동, 학대 또는 강간에 대해 특별히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형제복지원에 들어오는 새 입소생들 대부분은 비교적 건강했다고 정부 문서는 말한다. 그러나 1985년에 최소 15명, 그리고 1986년에 22명이 입소한 지 겨우 한 달 내에 사망했다.

김 검사가 제공한 형제복지원 내부 문서와 인터뷰, 그리고 기록에 따르면, 1985년과 1986년 사이에 형제복지원의 180건의 사망기록 중 55건의 사망증명서가 정명국이라는 한 명의 의사로부터 발급됐다. 이미 사망한 정 씨는 사인을 대부분 ‘심부전’과 ‘쇠약’으로 적었다.

형제복지원의 생활은 해뜨기 전에 시작되어 원생들은 세안 후 5시 30분 대형 확성기를 통해 전해지는 형제복지원 장로교회의 의무적인 예배에 참여했다. 아침 달리기 후, 원생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공장이나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공무원이나 해외 선교사들 또는 구호자들의 방문이 있을 때에는 선택된 일련의 건강한 원생들이 손님들을 위해 형제복지원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경비원들은 나머지 원생들을 기숙사에 가뒀다. 최 씨는 원생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 자선가들이 지나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봤다고 말했다.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누가 우리를 도울 수 있었겠나? 아무도 할 수 없었다’고 최 씨는 말했다.

최 씨는 일단 6시에 문이 일단 잠기면 경비원들이 자신의 기숙사에 있던 60명에서 100명에 이르는 아이들에게 잦은 강간을 포함하여 ‘통제 불능의 폭력’을 자행했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 가르친 적이 있는 부산에 있는 한 학교의 교장은 원생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붙잡혀 있었다고 인정했으며 심지어 형제복지원을 대형 집단수용소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자신의 평판에 대한 우려에서 익명의 조건으로 말한 그 교장은 형제복지원의 운영 방식을 단호하게 옹호했다.

그는 무자비한 폭력과 군대식의 규율만이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아 했던 수천 명의 제멋대로인 사람들로 가득한 형제복지원을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1980년 부산 기차역에서 9살의 나이에 경찰에게 끌려온 박선이 씨는 몇몇 탈출자 중 한 명이었다

박 씨는 경비원들이 도망치려는 원생들에게 가하는 가장 무지막지한 폭력을(그것은 원생들이 때로는 회복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지켜봤다. 그러나 5년이 지나자 박 씨는 ‘내 인생은 영원히 이런 식이다가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됐다고 말했다.

박 씨와 다른 5명의 소녀들은 철 작업 공장에서 가져온 망가진 톱을 사용, 밤에 조금씩 2층 창문의 빗장을 잘랐고 매일 아침 껌으로 그 빗장을 다시 붙였다. 마침내, 그들은 좁은 창문으로 가까스로 나와 깨진 유리가 박힌 담장을 넘어 언덕으로 도망쳤다.

박 씨가 마침내 문산에 있는 그녀의 집 문으로 들어서자 박 씨의 아버지는 까무러쳤다고 그녀는 말했다.

당시 울산에서 막 검사로 임명된 김 씨는 꿩을 사냥하던 중에 자신의 안내원으로부터 근처에 있는 산에서 나무 곤봉과 큰 개들을 데리고 후줄그레한 죄수들을 감시 중인 남자들에 대해 듣게 됐다.

김 검사와 안내원이 그곳으로 갔을 때 그 남성들은 자신들이 근처 부산에 있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를 위해 목장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김 검사는 즉시 자신이 ‘매우 심각한 범죄’와 맞닥뜨렸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1987년 1월의 몹시 추었던 어느 저녁 김 검사는 10명의 경찰을 이끌고 형제복지원의 높은 담장과 무시무시한 철문, 그리고 깜짝 놀라 입이 벌어진 경비원들을 통과해 기습적인 압수수색을 벌였다. 내부에서 그는 얻어맞고 영양실조에 걸린 수용자들이 초만원의 기숙사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원생들은 예상치 못한 방문자들에게 딱딱한 군대식 인사를 했다.

‘나는 “여기는 복지시설이 아니라 강제수용소다”라고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서울에 있는 한 법무법인의 경영 파트너인 전직 검사 김 씨(현재 61세)는 말했다. 사람들은 ‘죽을 날만을 기다리면서’ 불결한 병동에서 기침하고 신음하며 누워 있었다.

체포되고 난 뒤 복지원 원장은 김 검사의 상사로서 당시 울산을 담당했던 부산지검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 다음 날 2014년에 사망한 김주호 부산시장이 김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박 원장을 풀어주라고 간청했다. 김 검사는 공손하게 이를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부분적으로는 88올림픽 직전에 수치스러운 국제적 사건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고위 관리들이 그의 조사를 매번 막았다고 김 검사는 말했다.

박정희가 암살당한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막아내기도 바빠 다른 추문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

검찰 내부 수사기록물은, 김 검사가 수차례에 걸쳐 수사를 축소하고 복지원 소유주에 가벼운 처벌을 내리라는 심한 압박을 청와대로부터 받았음을 보여준다. 김 검사는 수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임을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알려 안심시켜야 했다.

당시 부산지검 부장검사이자 후에 법무장관을 지낸 박희태 는 김 검사가 형제복지원의 모든 원생들을 인터뷰하려는 것을 강제로 중단시킨 것을 포함해 수사범위를 축소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김 검사는 말했다.

 

현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인 박희태 는 AP통신과의 인터뷰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그의 비서관은 박희태가 수사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소유주가 1985년과 1986년에만도 현시세 3백만 달러에 맞먹는 금액을 횡령했음을 보여주는 은행거래내역서와 금융이체내역서를 찾아냈다.

 

이 돈은 원생들을 먹이고 입히며 수용소를 관리하도록 정부가 제공한 1천만 달러의 정부보조금의 일부였다.

 

그러나 김 검사는 현행법에 따라 무기징역을 피하도록 자신이 실제 찾아낸 액수의 거의 절반만 횡령으로 기입하도록 부산 지검장이 자신에게 강요했다고 말했다.

 

김 검사는 소유주 박 씨나 그 누구도 형제복지원에 만연했던 인권유린의 혐의로 기소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상사들이 자신을 막았고, 이 혐의를 자신이 사냥 중 직접 목도한 건설 현장과 관련시켜 훨씬 축소하도록 제한했다고 말했다.

 

김 검사는 박 씨에게 15년 징역형을 구형했다. 긴 법정 공방이 있은 후 1989년 대법원은 박 씨에게 횡령과 건축법, 초지 관리법과 외환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확정했다.

 

그는 수용소 밖에서의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두 명의 경비원만이, 한 명은 1년, 다른 한 명은 8개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출소 후에 박 씨는 복지시설과 부동산 부지 매매로 계속 돈을 벌었다. AP통신이 받은 토지거래 내역서를 보면 형제복지원 부지는 2001년 현시세 2천7백만 달러에 건설회사에 매각됐다.

 

박 씨의 딸 중 한 명은 문제 아동을 위한 학교를 운영했다가 2013년에 문을 닫았다. 2014년에 그의 가족은 중증장애인 수용시설을 매각했다.


1988년 형제복지원은 마침내 문을 닫았다. 1990년대에 건설 노동자들이 땅을 파다가 시설이 있던 곳에서 머지않은 산 쪽에서 100구가량의 시신을 찾았다고 시신들을 발견한 노동자 중 한 명인 이진섭 씨가 말했다.

 

뼈가 담요에 싸여 있거나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공식적으로 재빨리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이 씨는 생각했다. 시신 잔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들어선 그 현장을 최근 방문한 전 원생 최 씨와 이채식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라고 말하며 콘크리트로 덮인 예전 수조 위에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경비원들이 시신을 숲으로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아직 저곳에 수백 구의 시신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파른 경사지를 가리키면서 이 씨는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원생들은 결국에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보호소와 정신병원에서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알코올중독과 우울증, 분노, 수치 및 빈곤과 싸우고 있다.

 

형제복지원을 떠난 후 범죄조직에서 지내던 시절, 등에 큰 문신을 새긴 최 씨는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목소리를 내어 말하기 시작한 몇 명의 제소자들은 정의를 원한다. 이들은 사과를 받고자 하며 정부 관료들이 경찰을 시켜 구금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납치하고 가두도록 부추긴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현재는 호수가 근처에서 모텔을 관리하고 있는 이 씨는 ‘구타, 사체들, 뼈 빠지는 중노동, 공포…그 모든 나쁜 기억들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며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은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번역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출처:  https://thenewspro.org/?p=18727

원문: 

http://bigstory.ap.org/c22de3a565fe4e85a0508bbbd72c3c1b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3545761/Hell-Hell-Child-prisoners-rap...

 

IP : 222.233.xxx.22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오늘
    '16.4.30 2:11 PM (14.49.xxx.245) - 삭제된댓글

    상상 그 이상으로 소름끼치네요...
    삼청교육대도 그렇고....
    정말 80년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 2. 오늘
    '16.4.30 2:12 PM (14.49.xxx.245)

    상상 그 이상으로 소름끼치네요...
    삼청교육대도 그렇고....
    정말 80년대를 지나온 사람으로서~~
    무섭도록 몸서리칩니다.

  • 3. ...
    '16.4.30 3:05 PM (211.244.xxx.166)

    ㅜㅜ
    너무 무섭고 슬픕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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