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의원님, 개혁신당은 분열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김근태 의원님, 유시민입니다.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의원님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었던 1983년, 저는 5.18 이후 첫 번째로 탄생한 공개적 민주화운동 단체였던 바로 그 민청련의 막내였습니다. 지난 역정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모두 '문익환 목사님의 문하생'이며, 저는 '김근태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석에서는 언제나 '형님'이라고 하지만, 개혁신당을 둘러싼 정치적 이견에 관해 말씀드리는 오늘 편지에서는 '의원님'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제 <프레시안> 인터뷰를 보고 난 후 지금까지 마음이 좀 아프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합니다. 개혁신당을 바라보는 의원님의 시각이 김대중-김영삼의 분열이라는 1987년의 사건에 붙들려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적인 분열이 남긴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의원님의 지론을 저는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개혁신당론은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흐름이라는 것을 김의원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시거나 애써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개혁신당은 양김이 만든 지역주의 정치지형을 허무는 동시에 그분들이 남긴 낡고 부패한 정당구조와 정치문화를 혁신하는 정당개혁을 겨냥합니다. 저는 정당개혁을 제대로 함으로써 정치지형을 재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김의원님의 말씀에는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민주당의 분열에 대한 우려만이 가득합니다. 의원님은 개혁신당으로 가는 과정에서 벌어질 민주당의 분열이 '국민의 분열'을 일으킨다고 비판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되묻고 싶습니다. 지난 16년 동안 우리가 함께 목격하고 경험했던 영호남의 지역 분열보다 더한 '국민의 분열'이 달리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의원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다당제를 주장하는 분들은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대중, 정권 재창출을 이룬 대중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다. 그래서 분열적 지역주의를 고착시킬 위험이 있다. 자신들이 차별성을 갖기 위해서, 또 얼마간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로 국민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점을 왜 생각하지 않는가."
누구도 다당제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년 총선 결과 다당구도가 출현할 수도 있지만 양당구도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김의원님은 "수평적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을 분열시킬 위험"만을 강조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선거 때마다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을 그대로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죽어라고 한나라당만 찍어온 대중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정권재창출을 이룬 대중은 소중하고 거기 협조하지 않은 대중은 그냥 버려 두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만약 개혁신당 말고 영호남 유권자를 통합하는 다른 길을 제시하신다면 저도 개혁신당론을 접고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김의원님이 제시한 길은 개혁인사들이 모두 민주당의 틀 속으로 들어온 다음 당명을 바꾸고 국민참여 경선으로 국회의원 후보 물갈이를 하는 '개혁적 통합신당론'입니다. 누가 여기에 참가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구당위원장이기 때문에 잘 알지 않으십니까. 민주당은 당지도부 선거를 할 때도 돈봉투가 돌아다니는 정당입니다. 지구당 공조직에 속한 당원들이 자기 당의 공직선거 후보를 위해서 발벗고 뛰기보다는 후보를 우려먹는 데 골몰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민주당의 정책과 노선은 훌륭할지 모르나 조직의 구조와 문화를 보면 민주당도 한나라당이나 자민련과 별로 다르지 않은 동원형 정당입니다. 이 구조와 문화를 바꾸지 않고 도대체 무슨 수로 현역 지구당위원장을 물갈이할 수 있다는 말씀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몽땅 껴안고 가는 통합신당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민주당은 지난해 국민경선이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미 1년 넘게 사실상의 분당상태에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안방에서 끝도 없이 불길이 타오르는 집을 증축해 봐야 어디에 쓰겠습니까. 증축한 집도 조만간 그 내분의 불길에 휩싸이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그 집에 들어가 살고 싶지 않습니다. 김의원님께서는 저의 그런 발언을 이렇게 평하셨습니다.
"그분들도 정치인이다. 정치인은 때로 몸값을 올려야 하니까 그런 얘기하는 거 일 리 있다. 또 개혁당에 참여하는 분들은 더 개혁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교섭력을 높일 수 있는 거고. 난 그걸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죄송합니다. 김의원님은 저를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민주당과 몸값을 흥정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개혁당은 '지분'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정당입니다. 지금 제가 주장하는 개혁신당 역시 여러 세력이 지분 협상을 해서 만드는 정당이 아닙니다. 만약 정말로 제가 몸값을 올리려고 그러려니 생각하신다면 호되게 비판하십시오. 그 따위 정신을 가지고 무얼 하려느냐고 말입니다. 김의원님의 호의가 저는 조금도 반갑지 않습니다. 민주당의 당원명부와 개혁당의 당원명부를 합치고 새 사람을 수혈해서 간판을 바꾸는 신당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수백만 당원의 명부라는 것이, 사실은 현역 지구당위원장들이 사전선거운동을 하기 위해 당원용 홍보물을 합법적으로 발송하는 데 쓰는 데이터베이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김의원님께서도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당원모집부터 철저하게 국민운동방식으로 하고, 지구당도 상향식으로 구성하며, 주요 당직도 각급 당조직의 당원들이 선출하는 참여형 정당을 원합니다. 개혁당이 작은 규모로 시연한 바 있는 정당입니다. 개혁세력이 모두 개혁당에 들어오면 신당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구할 권리도 없고 다른 분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로 범민주세력 단일정당을 만들자고 제의했고, 개혁당도 그 논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개혁신당은 민주당에서 무엇을 가져가야 하겠습니까? '법통'이 아닙니다. 국고보조금도 아닙니다. 민주당에서 가져가야 할 것은 '법통'이나 국고보조금이 아니라 민주당의 자유주의적 정치개혁 노선과 대북평화 정책, 그리고 참여형 정당에 공감하는 민주당 소속의 정치인과 당원들이라고 저의 확신합니다. 영남, 호남, 충청, 강원, 제주, 수도권을 불문하고 이런 확신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만드는 전국적 정책정당, 이것이 저의 꿈이라는 말씀입니다.
존경하는 김근태 의원님. "국민을 믿지 않으면 개혁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김의원님 스스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국민을 믿고 가야 합니다. 수도권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저는 잘 압니다.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을 한 대중"은 민주당 지지층입니다. 이 "대중의 분열"은 민주당 고정표의 분산을 의미합니다. 불과 몇 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라졌던 수도권에서 민주당 고정 지지층이 분열하면 17대 총선에서 고전하거나 낙선할지 모릅니다. 개혁신당행 기차에 몸을 실음으로써 얻을지도 모를 새로운 지지층은 "약속어음"이지만 떨어져나가는 "호남표"는 현찰이 아니겠습니까? 불확실한 약속어음을 받기 위해 확실한 현찰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민주당 수도권 국회의원들의 눈에 '개혁적 통합신당'이라는 이름의 '외연을 확장한 민주당'이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드는 주된 요소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몇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눈에 보입니다. 지금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금뱃지를 달고 출근하는 정치인들은 대부분 지역주의 정치구도와 지역몰표에 붙잡힌 정치인질입니다. 저도 정치인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족쇄를 깨뜨리지 않으면 누구도 이 인질극을 끝낼 수 없습니다. 국민을 믿고 가십시다.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누구나 많든 적든 김대중 전대통령의 후광을 입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후광을 털어내고 자기 발로 굳건히 서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김대중에 대한 배신'도 아니요 '호남 버리기'도 아니며 '영남표에 대한 아첨'도 아닙니다. 국민을 믿고 시도하는 개혁세력의 독립선언입니다.
존경하는 김근태 의원님,
개인적으로 잘 알고 존경하는 선배와의 정치적 결별을 상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지금 제게 찾아든 이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치인들은 어떤 주장을 할 때에도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을 계산합니다. 개혁신당을 하자고 하는 정치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개혁신당론의 배후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타산과 정치공학을 눈여겨 살피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적 명분과 시대의 흐름을 먼저 살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2003. 5. 15
스승의 날에 문익환 목사님을 생각하며
유시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