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장남에게 시집와서 시동생 시부모 건사하느라 늘 힘들고 바빴어요. 아빠가 버는 돈이 지금 제 월급 수준도 안 되었을텐데 그 돈으로 대가족이 먹고 살아야 했으니. 나중에 삼촌들이 결혼하고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땐 많이 나아졌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일들이 아주 많았어요. 제사도 매년 10 번 가까이 지내야 했고.
엄마는 제 감정에 별로 신경 써 주질 못했어요. 항상 책임감 있고 사교적이긴 했지만 그건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수준이었고, 거기 너무 바빠서 겉으로 보이는 것이 평온하면 그냥 오케이. 지금 생각하면 본인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준 이상으로 열심히 해서 늘 감정적으로 지쳐있는 상태였어요. 좀 비관적이고 시니컬한 면도 있었어요. 집안의 존경받는 맏며느리였어요. 아빠는 보수적이고 말이 없는 편인데다 거의 항상 직장에 나가서 바빴어요. 기본적으론 딸바보이긴 한데, 말이 잘 안 통한달까. 거침없이 하이킥 이순재가 꼭 우리 아빠 같아요. 삼촌, 고모, 할머니가 계셔서 저를 많이 예뻐해 주시긴 했지만 다 채워지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지금도 삼촌 숙모 사촌들까지 드물게 다들 사이 좋고 화목한 집안이긴 해요.
가끔씩 마음이 우울하고,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부모님은 연세도 많고 자세한 얘긴 걱정할까봐 못 하고. 직장에 선배들이 있는데 그 중에 이해 관계가 없는 스승에게 가끔 고민을 얘길 하곤 해요. 아빠같은 분이거든요. 하지만 언제나 그럴 수도 없고,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요즘 여러 일들이 있는데, 정리가 잘 안 되고, 거기 제 묵은 문제들도 쏟아져 나와서 아주 복잡합니다.
어딘가에서 최근에 읽은 글 중에, 말이 통하고 취미가 비슷한 사람을 파트너로 구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인가 보라고 하더군요. 좋을 때 좋은 사람이 되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인간의 기본이 제대로 된 사람, 주변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제 주변에 아주 드물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저는 아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저도 부모님처럼 너무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느라고 하고 싶은 일을 잘 못 찾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