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정부가 공개한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공개 결과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실상 일제 강점하 피해청구권을 '전면 포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공개한 문서 5권에 따르면 정부가 당시 한일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에 대한 개인 청구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정부차원에서 받은 개인청구권이 포함된 보상자금도 대부분 경제분야에 집중 투자했음이 증명됐다. 결국 일본으로 부터 받은 보상금을 정부가 '유용, 착복'한 것이다.
개인 청구권 문제와 관련, 당시 박정희 정부가 협상과정에서 스스로 적극 나서 "협상에 정부나 개인의 청구권이 모두 포함됐다"는 점을 분명히 함에 따라 사실상 향후 발생 가능성이 있는 개인 청구권을 포기해버렸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는 당시 한일협정을 이뤄냈던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에 집착한 나머지 개인보상과 제대로된 대일피해보상 청구권, 일본정부 사과 등은 외면하고, 오로지 '돈'에만 급급한 결과여서 '굴욕외교' '정치적 거래에 의한 졸속외교'라는 비난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정권가 보상금을 경제자금에 쓴 것은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1기사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날 공개된 자료를 살펴보면 정부가 한일 협상 과정에서 여러번 청구권 자금을 경제분야에 투자할 뜻을 밝혀 정부가 처음부터 피해자들의 개인 보상에는 관심이 없었음이 드러났다.
한편, 회담 과정에서 일본측이 한일협정을 '청구권'이 아닌 '경제협력 지원'의 성격으로 규정지으려 집요하게 노력했으며, 이에 따라 정부는 단순히 '청구권'이 아닌 '청구권 및 경제협력'을 위한 성격으로 규정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정부는 당시 일제강점에 대한 '공식사과'하나 없었고, 보상금도 청구권과 경제협력자금이라고 성격을 불분명하게 함으로서 확실한 '피해보상금'이 아니다. 또 보상금 액수도 이승만 정권 당시만해도 우리정부는 일본에 20억달러를 요구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단 8억으로 합의를 본 것이다.
이에 국민들은 이 한일협정을 '보상차원'으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날 관련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비화, '굴욕외교' 협상의 전말이 드러남에 따라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에 중요한 근거들이 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른 파고는 예상을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1965년 타결된 이 협정으로 한일간에는 식민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가 회복되었고, 올해로 40주년이 된다.
개인 청구권 사실상 박정희 정부가 나서서 포기
지금까지 피해자들의 대일 보상 요구 소송에서 걸림돌이 됐던 것은 청구권 협정 2항의 '(개인 청구권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조항과 합의 의사록의 '(한국측은) 앞으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조문이었다.
김종필-오히라 회담.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65년 한일협정의 가이드라인이었다.정부가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함에 따라 이와같이 '개인 청구권의 완전 소멸'이 되게 된 과정이 드러났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일본측이 개인 보상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스스로 협정에 개인 청구권이 포함돼 있어 향후 '개인관계 청구권'이 소멸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밝혀져 앞으로 이에 대한 '개인 보상' 요구가봇물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6차 한일회담 청구권위원회 회의록 및 경제협력문제' 문서에 따르면 외무부는 경제기획원의 질의에 따른 답변에서 "한일회담 청구권은 정부당국의 청구권은 물론 국민이 보유하는 개인 청구권도 포함돼 있다"며 "청구권 문제가 해결되면 개인 청구권도 포함해 해결하는 것이므로 개인 청구권 보유자에게 보상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1965년 4월 20일 '7차 한일회담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 1차회의' 등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이규성 수석대표는 일본측에게 "' 우리측에서는 '이동원-시이나'합의 사항 제 5항에 규정돼 있는대로 모든 청구권이 해결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양국이 각각 국내적으로 어떻게 소화하며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일본측은 "개인 청구권이 없어진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소명되었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해둬야 한다는 것이 일본측 생각이다"며 "후일 분쟁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하며 이에 관한 서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규성 수석대표는 "지금까지의 청구권 문제해결의 경위로 보면 각종의 청구권이 덩어리로 해결된 것으로 되었는데 그다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결국 각각 국내의 문제로 취급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정부가 '돈'에만 급급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개인 청구권' 문제를 '어물쩍' 넘어간 것이어서 '정치적 거래에 의한 굴욕외교'라는 비난이 이는 것이다.
보상금, 정부는 처음부터 경제 관련 사업 투자계획
- 개인보상금 지급안하고 정부가 '착복'
'제 6차 한일회담 청구권 관계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63년 한일회담 과정에서 강제 징용됐던 한국인 피해자 103만 2684명에 대해 총 3억 6400만달러의 피해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했다.
생존자 93만81명, 사망자 7만7천603명,부상자 2만5천명 등 모두 103만 2684명을 피해자로 집계해 생존자에게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천650달러, 부상자 2천달러씩의 보상금을 산정해 일본측에 요구한 것이다.
회담 결과 결국 청구권 문제는 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3억달러 총 8억달러로 일괄타결됐다.
정부는 이에 따라 지난 75년부터 77년까지 8천 552명의 사망자에게 30만원씩 모두 25억6560만원을 지급했으며, 재산보상도 1엔당 30원을 기준으로 7만4967명에게 총 66억 2200여만원을 지급하는 등 총 91억8천769만3천원을 지급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부상자를 포함한 생존자는 보상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보상대상도 103만 2600여명의 개인보상금을 받아 겨우 사망자 8천여명에 30만원씩밖에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뿐만아니라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이 국민 전체에 대한 보상 성격이라는 정당성을 들어 경제 관련 사업에 사용했다. 정부가 청구권 자금을 피해 보상이 아닌 경제 건설에 집중 투자해버렸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본과 협상과정에서 개인보상금을 받아 피해자들에게 정부차원에서 개별 지급하겠다고 합의했으나, 일제 피해자의 개인보상금을 지급하지 않고 '착복,유용'해 버린 것이다.
이와같은 사실은 회담 과정에서 작성된 경제기획원의 청구권 자금 사용계획 관련 문서와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회의록 중 65년 5월 7일 제 4차 회의록이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4차 회의록에는 자금사용계획에 대한 정부의 보고 내용을 볼 수가 있는데 당시 박정희 정부의 김봉은 대표는 일본측에 "현재 1차, 2차 5개년 계획에는 청구권에 의한 재원은 전혀 반영돼지 않았으나 청구권이 해결되면 이 재원을 추가하여 경제계획에 반영시킬 예정이다"밝혔다.
김봉은 대표는 또 "청구권 사용의 기본방침은 3억불은 수익성이 적은 사업과 자본의 회임기간이 긴 부문, 농업분야, 사회 간접자본 및 고용효과가 큰 사업등에 집중 사용할 것이다"며 "유상 2억은 기간 공장의 설립, 전원개발, 철도 해운 등에 집중 사용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이때 나열된 17개항에는 농업,수력발전소,송전시설,철도사업,항만시설 등만이 들어있을 뿐 개인보상 항목은 전혀 없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일제강점 피해의 정부 및 개인보상금을 받아 처음부터 피해자들에게 보상하려한 것이 아니라 경제건설자금으로 쓰려고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