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중 외모가 출중한 여자를 만나면 중대본부로 끌고 와 겁탈한 것은 물론 뚜쟁이(중개인)까지 둬가면서 매일 밤 여자를 공급받았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실제 남산뫼 학살 당시 젊은 여자나 처녀들은 군인들이 욕보인다는 소문에 급히 머리를 올리거나 이웃집 아기를 안고 나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남산뫼 현장에서 한 여성을 중대본부로 끌고 가려하자 이를 막아선 그녀의 아버지를 군인들이 총살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어렵게 산을 빠져나온 이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군경의 보복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각 마을에는 경찰의 밀대(세작)가 주민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이들은 마을 동향을 파악한 뒤 입산자나 좌익 분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파출소에 신고했다.
불갑산을 빠져나온 정태진 씨 부친도 1951년 3월 20일(음력 2월 13일) 자수를 위해 마을을 찾았다가 밀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 씨 부자는 대보름작전이 있기 직전 산을 내려와 영광에서 숨어 지냈다. 이후 자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다행히 정 씨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