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즐겨가는 찜질방이 있어요..
건물 하나가 통째로 찜질방으로 쓰이는 서울에서 꽤 유명한 찜질방이에요.
워낙에 즐겨가기도 했지만, 그날은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 찜질방에서 이틀을 보내야 했었거든요.
여느때처럼 여자 수면실에 올라가서 잠을 자려고 했는데, 약간 리모델링이 되면서..
원래는 남녀 수면실이 완벽하게 분리되어있었는데, 그날 보니 남녀 공용으로 바껴버렸더라구요..
여자만 들어갈 수 있는 수면실이 남아있긴 했는데, 구석에 아주 작은 밀폐된 방이었고, 그날따라 비가 와서 그 밀폐된 공간이 더 꿉꿉하게 느껴져서 들어가기 싫었어요..
그래서 바깥에 있는 창가(창문이 살짝 열려있어서 통풍이 되서 시원했어요)쪽 2층 침대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는데요..
제가 원래는 워낙에 깊이 자는 스타일이라 업어가도 모르는데, 그날은 낮잠을 하도 많이 자서인지 선잠이 든 상태였죠..
그렇게 잠을 자는데.. 갑자기 허벅지 쪽에 뭔가 아주 미세하게 이상한 느낌이 딱 드는거에요..
그래서 눈을 딱 떴는데..
.....
세상에... 왠 남자가 제 찜질복 바지(바지 통이 헐렁하니 넓자나요..)를 슬쩍 들어올려서 보고 있는거 아니겠어요!!!!!!!
그 짧은 순간에 여기는 찜질방이고, 그 수면실에는 거의 만실일 정도로 제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
여기서 내가 소리를 질러도 그 사람이 날 어찌 못할 것이라는 것(즉 내 목숨에 위험은 없다는 것.)이라는 판단이 딱 서더라구요.
한순간에 그렇게 판단되니, 안심하고 진짜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죠... 꺄악~~ 꺄악~~~ 꺄악~~~~~~~!!!!!!!!!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범인과 저 둘만 있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 때가 새벽 2시 반쯤 됐을 때였을 거에요..
제가 소리지르자 범인은 후다닥 뛰어서 도망갔구요..
전 너무 놀라기도 했고,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겠어서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의미로도 더더욱 큰 소리로 소리질러댔죠....
원래는 수면실 밖에 항상 직원이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때 마침 그 직원이 자리를 비웠던 모양인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더라구요..
제 비명에 수면실 안에서 곤히 자고 있던 사람은 자다가 날벼락 맞고 무슨 일이냐며 웅성웅성하고....
하지만 정작 어둠 속에서 비명 소리만 들렸지.. 누가 비명을 무엇 때문에 질렀는지도 몰랐을거고..
잠에서 깨서 짜증내며 욕하고 수면실에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구요..
그 어떤 누구 하나 저에게 무슨 일이냐... 무엇때문에 그러냐..
그렇게 묻는 이도 도와주는 이도 하나 없었죠..
원래는 누가 도와줄거라 생각하고 비명을 지른건데, 제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저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서
어찌해야 할바를 몰라... 이대로 다시 잠을 자야하나..어찌해야 하나.. 앉아서 좀 고민하다가..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싶어..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일단 수면실 밖으로 나왔어요..
그 와중에 어떤 아줌마는 눈을 흘기며.. 별일도 아닌거 가지고 그런다고 혀를 끌끌 차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그렇게 수면실 밖으로 나오니, 수면실 밖에서 자던 아저씨 한분이 비명 소리를 듣고 직원을 불러왔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직원이 어떻게 하길 원하냐.. 경찰을 부르길 원하냐 묻길래..
경찰 불러달라고 했고, 경찰이 왔죠..
그래서 있었던 일들을 경찰에게 얘기했고, 경찰이 찜질방에서 한참 범인 잡겠다고 탐문하고 했는데,
제가 자고 있던 수면실은 CCTV가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작동하지는 않은 상황이었고.. 전 도망간 범인 뒷통수 밖에 보지 못한 상황이었구요.. 범인은 어디에 어떻게 도망을 갔는지.. 여전히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지도 오리무중이었죠..
경찰이 저에게 범인 잡기를 원하냐.. 처벌을 원하냐 묻길래, 전 꼭 잡기를 원하고 처벌도 원한다고 했더니,
그럼 형사 사건으로 인계하겠다고 해서, 그 새벽에 파출소에서 조서 비스무리한거 작성해서 경찰차타고(이 때 태어나서 처음 경찰차도 타봤죠 ㅎㅎ) 인근 큰 경찰서로 갔어요..
새벽이라... 드라마처럼 안에서 자고있던 형사들 문두드려서 깨우고 안에 들어가서 조서를 작성했죠..
그 와중에도.. 처음 타보는 경찰차에.. 처음 가보는 경찰서에.. 처음 작성해보는 조서에...
진짜 드라마에서 자주보던 딱 그 장면 그 상황이어서 웃기더군요.. ㅎ
나름 성폭력 사건에 해당되서, 형사가 담당 여형사를 불러와서.. 여형사가 자다가 불려와서는 아주 피곤에 쩐 모습으로 제 앞에 앉아서 조서를 작성하는데... 사건이 발생하면 밤낮없이 새벽에도 자다가 일어나야 하는구나 싶어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형사 분들 힘드시겠단 생각도 들더라구요.. ㅎ
사실.. CCTV도 없는 상황에서.. 전 범인을 잡을 수 있을거란 기대를 애초에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냥 넘어갈 순 없고, 신고라도 해야할 것 같아서 그렇게 접수를 하긴 했는데..
그날 그 당시엔 정말 살떨리고 치떨리고 그 불쾌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서 한 이틀정도 좀 그랬는데요..
물론 너무너무 불쾌하고 기분 나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만짐을 당한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성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고.. 바지 속을 들쳐보고 있었던거라...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수영장이나 해변가에선 비키니도 입는데 싶고..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 불쾌감을 떨쳐낼수가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든 그 사건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시간이 흘렀는데..
한 3개월뒤.. 전화가 한통 걸려왔어요..
어디어디 검찰청 무슨무슨 검사라면서.. 첨엔 보이스피싱인줄 알고 막 서둘러서 끊으려고 했는데.. ㅎㅎ
여검사님이 제 이름과 찜질방 사건을 언급하셔서 잊고있던 그 사건이 생각났죠..
검사님이 세상에.. 범인을 잡았다고.. 나보고 처벌을 원하냐고..
전 무엇보다.. 잡을 수 없을 줄 알았던 범인을 잡았대서 진짜 진심 너무너무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몇번이나 검사님께.. 정말이냐고.. 진짜냐고.. 정말 범인 잡았냐고..
못잡을 줄 알았다고.. 어떻게 잡았냐고.. 사건을 떠나서 진심 감탄이 나오더라구요 ㅎㅎ
그랬더니 검사님이.. 대한민국 경찰은 다 잡는다면서 ㅎㅎㅎ
저에게 처벌하기를 원하냐고 물으시더라구요.. 전 범인 잡으면 알아서 처벌받는줄 알았는데..
제가 처벌할지 말지 결정해야 되더라구요..
전, 그 범인이 새벽 2시반.. 사람이 한참 깊은 잠에 빠진 그 시각에..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느낌이 날랑말랑 바짓 가랑이를 아주 살짝 들어올리는 그 느낌이.. 한두번해본 솜씨가 아니라 상습범일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도대체 그사람은 뭐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냐 물으니.. 우리 동네에서 자영업하는 사람이었고.. 나이는 마흔정도이고.. 미혼이고.. 전과는 없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이게 막상 처벌하겠다고 하려니... 또 사람 마음이 그렇더군요..
장발장처럼 작은 실수 하나로.. 물론 너무 큰 실수이고 있어선 안되는 실수이지만.. 이 일로 그 사람 인생이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게 될 수도 있지 않나란 두려운 마음..
제가 처벌을 원한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물었더니.. 전자발찌를 채우고 전과 기록에 올라가고 무슨 교육을 몇번 받아야 하고.. 뭐 그렇다고..
그럼 내가 선처하겠다고 하면, 그럼 그냥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되냐고 하니.. 그건 아니고 성폭력 관련 교육은 매년 받아야 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 사람이 전과가 없고, 제가 당한 일이 아주 큰 일은 아니고(성폭행같은..) 또 그 사람이 아주 깊이 반성하고 두번다시 이런일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선처하겠다고 했더니...
검사님이 막 웃으시면서.. 보통은 합의금이나 이런거 받으려고 하는데 참 착하다고 하시면서 (ㅋ.......)
아무튼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이 됐어요..
이 모든 일련의 과정 속에서.. 무엇보다 뭐랄까.. 솔직히 경찰에 대한 불신이나 공권력에 대한 불신감(드라마나 영화같은거 보기도 하고.. 그것이 알고싶다 등등 시사프로 보면서.. ㅎㅎ)이 알게모르게 제 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처음 찜질방에 와서 저를 대했던 경찰들이나.. 그 새벽에 일어나서 성심성의껏 제 일에 대응해주신 형사님들이나..
전 사실 마음 속에선 포기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 범인을 색출해서 잡아낸 형사님들이나.. 정말 너무너무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대한민국 경찰이 참 든든하구나 싶고.. 막 그렇더라구요..
내가 낸 세금이 처음으로 아깝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죠.. ㅎㅎㅎ
최근에 있었던 일은 아니고 몇개월 전 이야기이에요.. 그 당시에 이 일을 나누고 싶었는데, 그 때는 이 사건을 떠올리기도 싫고... 주변 사람에게 내가 당한 얘기를 우스개 소리처럼 할 때마다.. 불쾌감이 두배 세배로 자꾸 증폭되길래.. 아예 없던 일로 생각하고 의식적으로 아예 생각조차 안하려고 했었어요..
제가 올해들어서 너무너무 버라이어티하고.. 태어나서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일들을 많이 겪어서.. (예를 들면 경찰차를 탄다거나.. 구급차를 탄다거나.. ㅎㅎㅎ)
이게 그 첫번째 사건이거든요 ㅎㅎ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얘기할 수 있어서 여기에 얘기를 풀어놔봐요~
한달에 한번씩 가던 찜질방은 그 날 이후로 발길을 딱 끊었답니다.. ㅎㅎ ㅠㅠ
결론은 찜질방은 잠잘곳이 못되는구나.. 싶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