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할아버지 저는 배를 곯아요”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일제 때 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수범씨는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수범씨는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대한민국 국적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아직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일제 때 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수범씨는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수범씨는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대한민국 국적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아직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끔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한다"
덕천씨의 아버지 정봉씨는 일제 때 징용을 나갔다가 덕천씨가 세 살 되던 해에 돌아왔는데, 한동안 정신이 이상해져서 경제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덕천씨는 턱뼈에서 구강암이 발견돼 보훈병원을 찾았으나 독립유공자가 광복 후에 사망했을 경우에는 2대까지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조항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