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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2세의 기막힌 사연
재일동포 2세인 강아무개(78)씨는 지난해 3월 여행가방 하나를 끌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4층짜리 집을 나섰다. 3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살던 곳이다. 그는 “외국에 가겠다.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를 두 아들에게 남겼다.
경남 하동이 고향인 강씨의 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터널과 댐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강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교육은 소학교 1학년 과정이 전부다. 동네 조선인 아저씨한테 한글을 조금 배웠지만 지금은 읽지 못한다. 한국말도 썩 잘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처럼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제화공으로 일하던 강씨는 39살에 작은 야키니쿠(불고기) 가게를 차렸다. 아내의 음식 솜씨가 좋았다. 구멍가게 수준이던 식당이 한번에 100명까지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돈도 제법 모았다. 그러나 함께 고생하던 아내가 세상을 뜨자 갑자기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눠준 뒤 오히려 관계가 멀어졌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사는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했다. 큰아들은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식 이름을 쓰고 일본인 아내와 산다. 강씨는 “돈 많이 벌면 안 된다. 한번 돈이 가면 마음은 오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씨는 “이런 생활에 지쳤다”며 편지를 남기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부모의 고향인 경남 하동과 세상을 뜬 아내의 연고지인 대구를 찾았다. 판문점에도 가봤다. 남은 돈으로 필리핀 여행을 갔던 강씨는 현지에서 사기를 당했다. 인천을 거쳐 오사카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만 겨우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내린 강씨는 오사카로 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강씨의 노숙인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국에서 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한테 들은 “밥 묵으라” “빨리 온나” 같은 간단한 한국말만 할 줄 안다. 인천공항에서 며칠을 버티다 무작정 도로를 따라 걸었다. 사흘을 굶은 채 공원에 쓰러져 있다가 발견됐고, 서울역 근처 노숙인 시설로 옮겨졌다. 시설 관계자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살겠다”고 고집했다. 한국말을 제대로 못하는 노인을 살갑게 대하는 노숙인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빵과 김밥을 얻어먹으며 서울역 지하도에서 여름을 맞았다. 한 노숙인이 무료급식소를 알려준 뒤에는 밥도 먹을 수 있게 됐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노숙인 인권단체인 홈리스행동 활동가들이 강씨를 발견한 것은 노숙 생활 넉달째로 접어든 지난해 8월 초다. 강씨의 건강 상태는 매우 나빴다. 홈리스행동은 시설을 알아봤지만 주민등록번호가 없어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외교부에 재외국민 영구귀국 신고서를 내고 일본 영주권을 반납한 뒤에야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었다. 또 기초생활수급자 자격도 얻어 고시원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지난 8일 찾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철로 주변 고시원에는 작은 침대와 텔레비전, 냉장고 하나가 살림의 전부였다. 몇분 간격으로 기차가 지날 때마다 방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그는 가끔 무임승차권을 받아 지하철을 타고 무작정 돌아다닌다고 했다. 종점까지 갔다 오기도 한다. “동대문역 근처에서 파는 2500원짜리 콩나물국밥이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라고 했다. 지난해 마지막날에는 지하철을 탔는데 눈이 내렸다. “슬퍼서 눈물이 많이 났다”고 했다. 강씨는 일주일에 한번씩은 홈리스행동 사무실에 간다. 같은 처지의 노숙인, 쪽방 생활자들과 탁구를 치며 소일한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오사카 출신인 그에게 ‘도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홈리스행동 소개로 만난 한 직장인은 퇴근길에 강씨 집에 들러 일본말로 말동무가 돼주기도 한다. 그는 강씨에게 한국어 교재와 연필을 선물하기도 했다. 강씨는 “노숙 생활을 마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에게 무척 고맙다”면서도 “소학교에 다니는 막내 손녀딸이 제일 보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강씨는 “일본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살다가 죽고 싶다”고 했다. 재일대한민국민단 지역지부 관계자는 13일 “재일동포 2세와 그 자녀 사이에 가치관이 달라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박태우 김지은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