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부끄러워요.
제 나이가 마흔을 향하고 있는데 이런 글을 쓴다는게,
익명의 공간에서 칭찬을 갈구한다는게,
한없이 부끄럽네요.
그래도 용기내어 글 쓸 맘을 먹었으니 써보겠습니다.
저요, 정신연령 3세에서 10세쯤으로 성장한 것 같아요.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느껴보나봐요.
드디어 엄마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를 지독히도 엄마의 굴레에 묶어놓았더랬죠. 그런데 이젠 저, 혼자 설 수 있고, 제 자신에 대해 기분이 좋아요. 몇달이 흘렀는데도 이런걸 보면 드디어 저, 이번에는 정말로 성장하나봅니다.
엄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동안 궁금한 적도 없었는데 이제서야 그 물음을 던지게 된 계기는, 그리고 그 답을 명확히 알게된 계기는 지난 4월 우리 마음을 산산이 부숴뜨린 그 일이었습니다. 정모씨 아들이 한 발언, 애가 아버지닮아 똑똑하다며, 우리나라 국민들은 미개하다고 막 웃으시던 엄마.
저는 너무 놀라서 엄마... 하고 나지막히 불렀는데 계속 웃으시며 잇기를, 얘~ 그 가족들 봐. 무식하게 물병은 왜 던지니 품위없이, 감히 국회의원, 장관들한테, 미개하게시리.... 저희 엄마요, 그 연세에서 볼때 최고 엘리트라 불리우는 학벌에 아직까지 현직에 계시는 고소득 전문직이랍니다.
정말로 엄마가 정신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줄 알았어요.
엄마, 그 가족들은 자식들이 수장되는걸 두눈으로 지켜보며 고통받는 사람들이야.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엄마라면 그 상황에서 품위차리고 있을수가 있겠어?
엄마는 나라면 당연히 그러지, 창피하고 품위없이 그게 뭐니 깔깔깔... 미개인 맞아!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러시는데, 퍼뜩 제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가는게 있었어요.
엄마는 과거에도 그런 사람이었고, 현재도, 앞으로도 그럴것이라는 깨달음.
나좀 예뻐해달라고, 이래도 안예뻐, 이래도? 얼마나 더 잘해야 나를 예뻐해주실까 하며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았다는걸 알았어요. 엄마의 사랑을 받기엔 내가 부족하고 잘못된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였나봐요.
키 165, 몸무게가 보통 38인 제가 지난 여름 엄마를 만났을때 42정도까지 올라갔었어요. 살쪘다고, 보기싫다고 오신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매끼니를 그러시다 가셨네요.
아래 어떤 글이 있던데, 저도 만 33세에 첫출산을 했어요. 난산으로 인해 수술을 하게 되었고, 아이를 꺼내고 난후 제게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난리가 났었대요. 깨어보니 중환자실. 엄마는 노산이라 그랬나보라고 한참 잔소리를 하시더니, 잠도 못자고 고생했을 사위걱정이셨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장애 판정을 받았어요. 그것도 남편쪽 가족력이 뚜렷한. 엄마는 그것도 제탓이었지요. 태가 안좋아 그렇다며, 제 태가 좋았더라면 그런 유전자 영향받지 않았을거라네요.
출산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입원을 한 적이 있었어요. 어릴적부터 저와 친구처럼 지내던 엄마 친구 자제가 정신과의사였어요. 그 친구자제분은 제 우울증을 알고있었고 입원을 여러번 권유했었거든요. 입원해있는 병원에 전화해서 가장 먼저 묻는 말이 '걔가 자기 엄마한테 얘기했다니?' 였어요. 아닐거라고 대답했더니 '어머머, 얘, 다행이다, 내가 걔 엄마가 알까봐 얼마나 걱정했던지 잠이 다 안오더라.' 다행이다를 수도없이 반복하고나서 괜찮냐는 한마디 없이 끊으셨어요.
전 서울 중위권대학을 나왔어요. 엄마 친구들은 제가 최소한 Y대정도는 갈줄 알았다는데 창피해서 대학동문회 몇년간 못나가고 골프도 안가셨대요. 자녀 대학턱 쏘는게 소원이었는데...
그리고 저의 취직, 꽤 괜찮은 곳에 들어갔어요. 드디어 친구들에게 할말이 생겼다며 그때 못쏜 대학턱 지금 쏘겠다며 여기 저기 전화하시며 흐뭇해하시던 엄마.
직장 몇년 다니면서 돈을 모아 차를 사려 하던 차였어요. 컨버터블을 사려고 하는데 경박스럽고 고상치 못하다며, 엄마친구 자식들은 중형 세단 탄다며, 제 차 보면 친구들이 엄마보고 뭐라하겠냐... 저는, 그래서 차 안샀어요. ㅎ
어릴때 부모님은 이혼하였고, 엄마는 강남에 아버지와 저희들은 강북에 살았어요. 엄마는 볼때마다 '강북스럽게' 품위없이 하고다닌다며, 미용실 데려가서 미스코리아 배출하는 '원장님'에게 '얘 땟국물좀 벗겨주세요'. 저는 늘 엄마를 만나기 전에 '원장님'을 거치고 나가곤 했어요. 엄마는 제 '고상하고 품위있는' 모습에 흐뭇해하셨죠.
아버지의 학대에도 니가 등신같아서 덤비지도 못한다며 되려 신경질을 내셨고,
웃을때 아버지닮았다며 웃지 말라고해서 엄마앞에선 웃을 수가 없었어요. 어린 마음에 엄마 가슴아프게 하는것 같아서.
제가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아빠가 바람피우지 않았을거라던 할머니 말씀에 엄마는 맞다며 여태까지 너가 아들이었더라면, 을 아직까지도 잊을만하면 반복하세요.
시댁이 겉으로는 쟁쟁한 집안, 그러나 속은 곪을대로 곪아 몇번씩 파혼당한 남편. 엄마는 제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그 사람을 만난 일이라며, 창피하던 당신의 자식을 이제서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손을잡고 우셨지요. 저는 '품위있는 결혼'은 다들 그렇게들 하는구나 생각하고 바보같이 엄마를 기쁘게 해드린게 스스로 대견해 했답니다.
별거중인 시댁, 시아버지는 제가 시어머니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길바닥에 무릎꿇여놓고 발길질을 했는데도 엄마는 자식 잘못 키워 죄송하다며 비싼 골프클럽을 선물하셨고,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일로 인한 남편과의 불화속에서도 이혼만은 절대 안된다며, 너보다 학벌 좋은 ㅇ서방 말이 들어볼 필요도 없이 당연히 맞겠지 어련하겠어, 너가 오죽 못났으면, 혹은 주변에서 이혼하면 사람들이 엄마를 흉본다,
남편은 좀 달랐어요. 한참후에야 알게된 남편의 장애, 가족력. 불화가 극에 달했더랬죠.
결혼후 줄곧 해외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고 인격과 가치관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남편때문에 장애가 있는 아이 돌보며 가족경제를 책임져왔는데, 사정 뻔히 알면서도 때되면 친척, 이웃, 도우미아주머니, 심지어는 아파트 경비아저씨 선물까지 챙기라는 엄마. 잊지않고 덧붙이는 '내가 뭐가 되겠니?'...
생각해보면 엄마는 저에 대한 기대가 참 크셨어요.
네살때 처음으로 악기 콩쿨을 나갔지요. 엄마는 어디서 그런걸 구했는지도 모르겠는 정말 예쁜 드레스를 사주셨어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서자마자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는거예요. 처음 몇소절을 틀리게 하다가 결국은 연주 를 마쳤는데, 경품으로 받은 박스를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너때문에 창피해서 집에 가버리고 싶었다고, 그 드레스가 얼마짜리인줄 아냐며 아깝다고 펄펄 뛰셨더랬죠. 저는요, 일반적이라면 악기에 질려버려 그만 두었겠지만, 죽어라 연습했어요. 그 후로 13년을 매년 이런저런 콩쿨에 나가 상을 받아와서 엄마에게 보여줬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제 첫 콩쿨을 잊지않고 상기시켜주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레슨받고 연습했는데 고3 올라가면서 그만두고서는 다시는 악기에 손도 안대고 있습니다. 저도 참 어지간하지요...
반장선거 나가서 떨어졌다며 창피하다, 엄마 친구들 만났는데 씩씩하게 인사 안해서 창피하다, 눈썹이 안예쁘게 나서 창피하다, 머리카락이 무식해보이게 많아서 창피하다, 손톱이 못생겨서 창피하다, 목소리가 작아서 창피하다, 가슴이 작아서 창피하다, 엄마보다 키가 작아 창피하다,,,
몇달전 엄마에게 드디어 이야기했어요. 엄마가 창피해도 참으라고, 나 이혼하기로 했고, 재산분할 해야할것같고, 양육비 기대 안한다. 엄마는 부끄러우면 비밀로 하던지 맘대로 하시라고,
나 지금 45킬로 가까이 나가는데 내 자신이 좋으니까 엄마 뭐라해도 난 살 안뺄거다,
엄마가 화가 나셨는지 전화도 안하시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이제 제 자신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내년 이맘때쯤이면 저 20세로 성장했다고 글쓰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