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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9. 금요일
물뚝심송
니들은 정말 좋겠다. 축하한다.
근대국가 체계에는 헌법이라는 것이 있고, 그 헌법을 지키기 위해 헌법재판소라는 걸 만들었잖아. 근데 그게 대부분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문제들만 다루게 되거든. 버뜨, 이 나라에선 바로 그 헌재가 무슨 국가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것처럼 신기한 결정을 막 내려.
수도를 옮기겠다고 그러니까 헌재가 나서서 관습헌법에 따르면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네.
대통령을 탄핵해 달라고 하니까 눈치 보더니 탄핵은 안된다며 대통령을 구해주기도 했어.
그러더니 지지율 4%대를 꾸준히 달리는 합법적인 정당을 해산해 달라고 요구하니까 요구는 적법하고 정당은 해산되어야
하며 소속 의원은 지역구건 비례건 다 의원직 상실이래.
이렇게 헌법재판소가 세계 법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판결들을 연속적으로 내리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세대가 우리 말고 또 있을 것 같아? 이걸 축하 안하면 뭘 축하하겠어? 그래서 경축이야. 경축. 축하한다고.. 씨바.
권력의 도구가 되어버린 헌재
헌법재판소는 원래 제2공화국 시절부터 있었어야 하는 기구였어. 이승만 쫓아내고 만든 제2공화국 헌법에는 헌재의 설치를 규정하고 있었는데 박정희가 군홧발로 짓밟아 버리는 바람에 발족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었지.
그러다가 무려 30년 가까이나 흐른 뒤 87년 체제에서 다시 명문화되고 정식으로 발족한 거야. 역사도 그리 길지 않아. 물론 헌재의 존재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헌법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국가의 뼈대이며 간혹 발생하는 다양한 법안들의 위헌 논란을 누군가는 판단 해 줘야 할 필요가 있는 거니까 말야. 대법원이 그것까지 겸하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을 해. 이 법이 헌법 정신과 맥이 통하는가, 아니면 헌법 정신을 훼손하는가 하는 판단을 법원이 해 버리면 사법부와 입법부의 권한에 있어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는 거지.
87년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헌재가 딱 그 역할까지만 해 주길 기대한 것 같아. 물론 그런 역할도 많이 했어. 많은 악법들이 위헌 판결로 인해 사라지기도 했거든. 이건 의회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기도 하지.
그런데 권력은 그 헌재를 다른 곳에 이용하기 시작했어. 헌법의 권위, 그 권위있는 헌법을 해석하는 헌재, 즉 헌재가 이 법은, 이 정책은, 이 결정은, 심지어 이 정당은 헌법 정신에 맞지 않는다 해 버리면 모두 해체시켜 버릴 수 있다는, 그렇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라는 것을 눈치를 챈거야.
그렇다고 헌재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나? 그건 또 아니지. 헌재는 헌재일 뿐, 헌법재판관들은 미안한 얘기지만 한 물 간 퇴물 법관들이 꿰차고 들어 앉는 자리인 것 맞잖아. 그런 재판관들에게 적절한 압력을 가하면 언제든지 권력이 원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헌법이 주는 명분과 권위를 덧칠하게 된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런 메커니즘이 멋지게 작동되는 것을 봤어.
수도 이전을 맹렬하게 반대하던 세력들이 헌재를 이용해 수도 이전을 무산시켜 버렸지. 뭐 결국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우회로가 채택되기는 했지만 말야.
상고 밖에 못 나온 촌놈 대통령을 못 참겠던 세력들이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걸 헌재를 통해 시도하기도 했지. 결국 광화문에 모인 엄청난 사람들을 보고 쫄아붙은 헌재 할배들이 포기하긴 했었지.
그러더니 이번에는 종북좌빨 빨갱이 주사파 새끼들이 정당놀이 하는 것을 못내 참아내지 못한 정권이 통합진보당이라는 정당 하나를 날려 버리자고 헌재를 이용했고, 헌재는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췄어. 그 장단은 8:1 장단이었고.
결국 야심차게 만들어진 87년 헌법의 최대 구멍이 바로 헌법재판소였다는 얘기가 되는 거야. 황당하다 진짜. 정말 신기하지 않아? 권력은 언제나 어떤 시스템이거나 그 헛점을 절묘하게 찾아내서 악용한다는 이 만고불변의 진리가 내게는 진짜 정말 너무 신기해.
너무 신기하다 보니 박근혜 가카께서 대선 후보 시절 눈 똑바로 뜨고 대들던 이정희라는 싸가지 없는(근데 재수없게 공부는 훨씬 더 잘한) 여자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 일을 벌인 거라는 얘기가 솔깃하게 들릴 정도야. 물론 그렇게 속 좁은 분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
아니 사실은 좀 더 복잡한 메커니즘이 숨어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해.
윈-윈 전략
솔직히 말해서 종북이라는 표현은 맘에 안 들지만, 통진당의 주류 멤버들이 NL계열 주사파의 후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이 사람들이 항상 노동판에서 운동판에서 가장 앞서서 뛰었던 것도 사실이고 말야.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조금도 진화하지 못한 박물관에 있는 공룡 같은 존재들이 되어 버려서 사사건건 진보계열의 발목을 잡아왔던 것도 다들 잘 알고 있겠지.
그런데 세월이 너무 흘렀어. 시대가 변했다고. 당연히 이 사람들도 변해야 하고, 변하고 있어. 느려서 안 보이지만 말야. 그런 상황에서 이 사람들만큼 종북이나 좌빨 딱지 붙여서 공안 통치에 써먹기 좋은 존재들도 없거든. 이거 사실이잖아.
복지를 말해도 빨갱이, 인권을 말해도 빨갱이, 성소수자를 말해도 빨갱이, 애들 밥 먹이자고 해도 빨갱이, 월급 좀 더 달라고 해도 빨갱이, 이 빨갱이 타령이 안 통하는 곳이 없을 정도로 효율적인 권력의 무기라는 것도 잘 알잖아.
그런 상황에서 이석기 일당 같은 사람들이 세력을 잃고 저절로 사라져봐. 그 때 가서는 도대체 이 정권은 무슨 무기로 사람을 때려잡아야 할까? 종북 좌빨, 빨갱이 타령 만큼 효율적인 레토릭이 또 있을까? 그거 만들어질까? 권력의 입장에서는 불편하다는 거지.
이미 이석기 일당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었어. 단지 그들이 건설해 놓은 조직만 살아남아 움직이고 있던 거지. 권력의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좀더 오래 수명을 연장하게 되길 바랄 수도 있어. 아니 난 그들이 이걸 바라고 있다고 판단하는 거야.
이제 통합진보당은 해산 명령을 받았고, 이들의 활동은 불법의 딱지가 붙게 될 거야. 이들은 다시 지하 활동을 전개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정당을 창당할 수도 있어. 통진당을 지지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 가서 무슨 활동을 하건, 무슨 정당을 만들건, 기존의 정당에 가입하건 그 낙인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오천 명이 모여 창당을 하는데 과거 통진당 당직자가 한두 명만 섞여 들어가도 그 당은 종북 낙인이 찍힐 수도 있어.
이 낙인효과는 아주 효율적인 무기가 될 거 같아. 권력은 이런 것을 바란 게 아닐까? 맘에 안드는 어떤 조직이라도 낙인을 막 찍어댈 수 있으니 말야. 얼쑤 조타~
반대로 해산명령을 받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어차피 지지율은 하락세였고 다음 번 선거를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었어. 합법 정당 활동에 대한 매력이 떨어지고 있던 중이라는 거지. 그 와중에 이 독재정권에게 한 방 먹었어.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권자 3-4%의 고른 지지를 공식적으로 받는 합법정당을 해산시키다니!!!! 이런 독재정권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나? 지지자들은 극도로 분노하겠지. 분노는 힘이고 활동 에너지의 원천이야. 다시 세가 늘어날 거고, 시들어가던 승리의 V, 이석기 동지는 다시 부활하는 거야. 지하 혁명가의 당당한 모습으로 말야. 이제 자신들이 그렇게 원하던 혁명의 시절이 도래한 거지. 언제나 꿈에 그리던 반정부 투쟁의 선봉에 자신들이 서는 모습이 드디어 헌재의 도움으로 현실화 되기 시작했다고.
결코 나쁘지 않아.
그렇게 이 판결은 권력과 이석기 일당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윈-윈 전략에 의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그게 내 판단이야.
법치주의의 종말
그러나 그 양 측이 윈 했다고 해서 우리가 윈 하는 것은 아니지.
난 헌재가 통진당 해산 판결을 내릴 거라고 예측했어. 어떤 인간은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주장을 했고 우리 둘은 내기를 걸었어.
그리고 판결이 내려졌고 난 그에게 'I won' 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그 쪽에서 답장이 오더군.
'We lost'
맞아. 우리 모두 졌어. 권력과 통진당 사람들을 뺀 우리가 아니라, 이 거대한 국가 대한민국호에 탑승하고 있는 모든 승객이 졌어. 대한민국이 패배한 거라고.
법은 정치가 아냐.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고 도덕률과 관계가 없으며 권력을 향해 달리는 폭주 기관차 같은 존재야. 하지만 법은 그래서는 안돼.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서로의 이해관계가 갈리기 전에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 서로가 논리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선에서 만들어지는, 그래야 하는 규칙이라고.
그리고 그 규칙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과정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이게 원칙이야. 그래서 사법부는 권력에서 독립해야 하는 것이고, 법은 지켜져야 하는 거야. 법치주의는 이런 관점에서 현대 국가들이 가장 최우선적으로 존중해야 하는 일종의 보루 같은 거잖아.
판결이 내려지자 마자 정치인들이 논평을 시작했어. 안철수도 하고 박지원도 하고. 모두가 헌재의 판결을 존중한다네. 하지만 정당의 해산은 국민 혹은 유권자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네.
헌재의 판결은 존중 받을 가치가 없어. 왜냐고?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정치 논리에 따라 내려진 판결이었기 때문이지. 윈-윈 전략이었건 치졸한 복수극이건 비선조직 문제를 덮기 위한 꼼수이건 상관없어. 이 판결은 법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전혀 법학적이지 못한, 법적이지 못한 창피한 판결이야.
법이라는 무기를 손에 든 헌법재판관들이 법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판결을 내렸는데 이게 무슨 법치주의야?
헌재는 법을 모독하고 법치주의를 모독했어. 그것도 그 장엄한 법복을 입고 둘러앉아서 말야. 9명의 헌법재판관들 중 8명이 자신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판결에 서명을 했어.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진 날이야. 권력의 이익 앞에 그렇게 홀가분하게 법치주의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져 버린 알몸뚱이의 대한민국이 되어 버린 날이야.
역사에 길이 길이 기록될 거야. 세계 법학사에도 찬란하게 기록되겠지.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법의 가치를 2014년 12월 19일에 처참하게 짓밟아 버렸다고 말야. 이렇게 우리 모두는 져 버린 거야.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더 이상 어찌 해볼 도리가 없게 완벽하게 패배했어.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사망하셨습니다. 사인은 헌재에 의한 살인입니다. 삼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에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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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판결 존중? 웃기고 있네
글이 쉽지만 길어여 조회수 : 962
작성일 : 2014-12-21 22:47:39
IP : 183.91.xxx.219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ㅠㅠ
'14.12.21 11:10 PM (211.179.xxx.67)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결과를 보고 새삼 암담하더라는...
2. 설마
'14.12.22 9:53 AM (222.107.xxx.181)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판결 내릴리없다 생각했는데
선고 날짜 예상보다 앞당겨진거 보고
아 괜한 희망을 가졌었구나 했네요
미친 세상에서 눈 뜨고 살아가기가 힘든거죠3. 아주 돌아버렸구만 헌재
'14.12.22 10:13 AM (112.217.xxx.107)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판결 내릴리없다 생각했는데
선고 날짜 예상보다 앞당겨진거 보고
아 괜한 희망을 가졌었구나 했네요
미친 세상에서 눈 뜨고 살아가기가 힘든거죠 222222222224. 아줌마
'14.12.22 10:56 AM (115.132.xxx.135)정말 암담합니다. 한국이 이렇게 침몰해도 되는 거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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