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눈물나네요. 진정한 의사..
http://www.doctor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299
정방론(淨 房 論)
며칠 전 원내 전화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기억하겠느냐고 묻는 남자를 더듬어보니 예전 병원에 근무했을 때 알게 된 환자의 보호자였습니다.
그 도시를 떠난 지가 사년 째이고 환자의 연은 이 보다 더 긴 칠년 째였습니다. 떠나기 전에는 간혹 의사와 환자, 의사와 보호자로 만나기는 하였지만 이후로는 서로 연락이 없던 차였습니다. 갑작스런 전화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무척 반가웠습니다.
남자 분은 제가 다른 병원으로 이직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뒤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그의 팔십 노모는 생명의 은인을 모른 체 한다고 호통까지 쳤다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저를 검색하고 어찌어찌해 지금 병원에 근무하는 것을 알고 연락을 한 것입니다.
연신 고맙고 죄송하다며 잘 지내시냐는 안부를 물어왔고, 덧붙여 당시 환자였던 자신의 남동생도 건강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가 건강하다면 의사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것은 없지요. 추석 때 인사를 하러 온다고 하는 것을 극구 사양했습니다.
가족과 고향 친지들이 모이는 뜻 깊은 명절에 그런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저 이렇게 저를 기억해주고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연락을 하며 연을 이어가자는 그 분의 호의에 오히려 그 때 일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칠년 전 어느 일요일로 기억합니다.
그날은 제가 당직이라 혼자 오전 근무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진료를 시작하려는데 응급실에서 다급한 호출이 왔습니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남자가 의식을 잃고 실려 왔다는 겁니다. 급히 내려 가보니 환자는 벌써 심장이 멈춘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체됐는지 피부가 새하얗게 핏기를 잃고 동공도 크게 열려 있었습니다.
구급 대원의 말을 빌리면, 조기 축구를 하는데 환자가 공을 찬 뒤에 갑자기 쓰러졌다 했습니다. 슛한 공이 골대 위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다가 의식을 잃었답니다. 심근경색이 의심됐습니다. 사정이 어찌 됐든 저는 곧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젊은 환자의 경우 심폐소생술을 하면 심장이 곧잘 되살아나곤 하는데 이 환자는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강심제 주사를 여러 번 투여하고 심장제세동기를 수차례나 때렸습니다. 두 시간 정도 환자의 가슴을 압박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심장이 멈추고 3분간 혈액공급이 지체되면 뇌로 가는 산소가 부족해 살아나도 후유증이 남습니다. 그리고 30여 분정도 심폐소생술을 해서도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환자가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제가 예외적으로 두 시간이나 집중했던 것은 오로지 이 환자가 젊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온 몸이 땀에 젖고 팔 다리가 뻐근해져 왔습니다. 외래에서는 환자들이 진료를 안 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이 만큼 했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속으로 판단했습니다. 환자의 보호자를 만난 것은 그 때였습니다. 가족들에게는 휴일 아침에 닥친 청천벽력의 소식이었을 겁니다. 형님이라는 분이 너무나 많이 울더군요.
형님은 동생을 살려 달라고, 조금만 더 심폐소생술을 해달라고 제게 사정사정했습니다. 저는 무의미한 일이라며 냉정하게 거부했습니다. 이미 두 시간 정도나 충분히 했고 지금으로서는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고 감히 확언까지 했습니다. 마음이 아프겠지만 임종 맞을 준비를 하면 사망선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계속 심장 압박을 한다는 것은 망자에 대한 예가 아니라며 제 결정에 동의하기를 은근히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분명 그랬습니다. 제 판단에 하나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사망을 선언하려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딸로 보이는 어린 아이가 갑자기 환자의 품속에 뛰어들더니 '아빠! 아빠!'하며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차갑게 식은 아빠를 부여잡고 우는 그 모습이 왜 그리 가슴에 박히던지요. 아마 저에게도 고만한 정도의 딸아이가 있어서 그랬나 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내가 사망 선언을 하고 돌아서면 이 아이는 평생 아빠를 못 보고 그리워만 하며 살겠구나, 내가 저 환자처럼 죽어 있다면 내 딸아이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분명 싸구려 감상일지도 몰랐습니다.
형님 분에게 조금만 더 해 보겠다하고 다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대기 환자들은 진료 언제 하냐고 밖에서 소란을 피더군요. 사람들이 참 야속했습니다.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나 봅니다.
'여기 사람 죽어가는 거 안 보여요? 사람들이 정말 양심도 없어. 사람이 죽어 가는데 자기네들만 아프다고 말야…. 그렇게 아프면 딴 병원에 가요!' 하고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다시 심장을 누른지 몇 분 안 돼 환자의 심장이 뛰더란 말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두 시간이나 죽은 환자가 다시 심장이 뛰다니요. 의사 생활 이십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도 흥분됐습니다.
▲ 일러스트=윤세호 기자의식은 여전히 혼수상태였지만 혈압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심장이 잠깐 뛰다가 다시 멈추는 것은 아닐까? 이대로 심장만 뛰고 뇌는 죽어 식물인간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걱정이 스치고도 지나갔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다음날 환자는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고 전날 자기가 슛하다가 쓰러진 것까지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병원에서는 이 놀라운 사실이 화제가 되어 난리였습니다. 환자 보호자들은 저를 찾아와 큰절을 하더군요. 주변에서도 저를 신의 손이라 치켜세우고 찬사일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히 기쁘지만은 않았습니다. 환자를 살려냈다는 자부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의학적 상식에 반한 현실에 당황하고 당혹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환자는 내가 살린 것이 아니라 신비로운 무언가가 살린 거다(제 생각에는 딸아이의 간절한 눈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혹시 그 때, 내가 오만한 의료 지식과 경험만 믿고 심폐소생술을 그만두었다면 이 환자는 죽었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그랬다면 저는 저도 모르게 환자의 죽음을 방치한 셈이었습니다. 모골이 송연해지더군요. 삶과 죽음을 너무 간단히 생각했다는 두려움에 손이 떨렸습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봤습니다. 문득 살 가망성이 있는데도 그동안 내가 불가하다고 미리 판단하고 손을 거둔 환자는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판단하고 환자를 보긴 했던 것일까? 의학이라는 과학에 너무 편협하게만 기울어져 따뜻한 시선을 잃고 냉정한 판단만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이런 연유로 저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해하는 보호자 분께 자긍심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던 겁니다.
지난 주말 저녁에는 의대 동기들을 만났습니다. 졸업한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십여 년이나 흘렀습니다. 모두들 변했더군요. 희끗한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 살이 오르고 툭 튀어나온 배가 완연한 중년의 모습들이었습니다.
서로의 대화 화제도 젊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 세상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진실한 삶에 대해 고민하며 작은 술잔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의사로서 누구는 봉사의 기쁨을, 누구는 생명을 구하는 삶을, 누구는 학문의 발전을 위한 꿈을 희망했습니다. 그런 열정으로 삶을 진하게 살자고 마음을 다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청춘의 꿈은 바래지고 우리는 현실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모두 자식의 학군 이야기와 골프장 회원권 이야기와 아파트 평수 이야기와 새 자동차 이야기뿐이었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가 보다는 한 달에 얼마 벌었냐는 얘기뿐이었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늘한 밤거리를 한참이나 걸었나 봅니다. 지난 상념을 하다가 졸업 환송식에서 노교수님이 한 덕담을 떠올렸습니다. 거나하게 취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 소중한 뒷간이 되라'
세상의 빛이 되라,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세상의 뒷간이 되라니요. 저희는 교수님의 말씀을 농으로만 여기고 웃어댔습니다.
뒷간 자체는 똥오줌이 쌓이는 더러운 곳이지만 사람에게는 배설의 쾌감을 느끼는 곳입니다. 뒷간이 편안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일부러 변비의 고통을 감수하며 찾지 않기도 합니다.
교수님은 의사라면 환자의 피고름 똥오줌을 더러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뒷간처럼 오히려 온전히 받아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있듯이 진정한 의사는 환자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심적 고통까지 편안히 다 받아주고 풀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의 설명에 그제야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저는 그것을 그야말로 '똥통 철학'이라고 부르며 감명 깊게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초심을 잊고 지냈던 겁니다.
환자의 고통과 정신적 평안까지 책임지겠다는 젊은 의사의 열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타성에 젖어 병만 보고 사람은 보지 않는 늙은 의사만 남았습니다. 이런 못난 저를 두고 세상의 은인으로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퍼뜩 정신을 차려봅니다.
생각해보니 저를 찾는 환자들은 제가 그네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를 살리는 분들이었습니다. 더께가 앉은 제 생활에서 의사라는 향기가 무엇인지 다시 일깨워주는 분들이었습니다.
뒷간, 화장실을 '정방(淨房)'이라고도 한다지요? 교수님의 '똥통 철학'을 저는 이제 '정방론(淨房論)'이라고 부르며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환자의 고통과 슬픔을 깨끗이 만드는 '정방(淨房)'의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돈 냄새, 구린 냄새보다는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향기로운 '정방'을 다시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멀리 노란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에는 풋풋한 가을 내음이 유난히 가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