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 ‘찌라시’라면서 유출은 국기문란 행위?
남북대화록 왜곡 유출은 국민 알권리라더니…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83중학생이면 다 아는 고사 한 편입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태자 부소를 죽이고 덜떨어진 호해를 황제로 옹립합니다. 그는 호해가 환락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이사 등 원로 중신들을 숙청하고 전권을 장악합니다. 어느 날 조고는 어전회의에 사슴 한 마리를 끌어다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폐하를 위해 애써 구한 명마입니다.”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니(지록위마·指鹿爲馬).” “폐하, 틀림없는 말입니다. 공들이 보기에 저게 말이오, 사슴이오?” 조고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습니다. 그 앞에서 바른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작성한 감찰 문건을 놓고 벌이는 일들을 보면, 중국의 통일제국 진나라의 몰락기 환관 조고와 황제 호해가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청와대 문건은 청와대 문고리 권력의 횡포에 관한 것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축출을 시도하고, 박지만씨 견제 차원에서 미행을 붙이고, 주요 인사와 이권에 개입했다는 따위의 의혹을 감찰한 것이었습니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올해 1월6일 작성한 ‘청와대 비서실장 교체설 등 브이아이피 측근(정윤회) 동향’ 감찰보고서. 세계일보 제공
이 문건이 보도되자, 청와대 측근들은 지난 28일 <세계일보>를 고소하면서 문건 유출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국정을 농단했다는 문건 내용은 증권가에 떠도는 쓰레기 정보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문건을 유출한 데는 특별한 저의가 있을 터이니, 검찰에서 유출 경위를 수사해 처벌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흘 뒤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문건의 외부 유출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다”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확인조차 하지 않고 의혹이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큰 문제다.”
내용의 실체적 진실 수사도 지시했지만, 대통령은 이미 가이드라인을 정했습니다. ‘관련자에게 물으면 금방 확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말 속에 지침은 포함돼 있습니다. 관련자들은 이미 ‘단 1%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휘하는 것인지….
문건은 공직기강비서관과 민정수석비서관을 거쳐 비서실장에게까지 보고된 것이었습니다. 청와대가 아무리 할 일 없이 빈둥대는 조직이라 하더라도 증권가 풍설이나 주워 모을 리는 없습니다. 민정수석이나 비서실장이 아무리 풍설에 현혹되는 인물이라 해도 그런 찌라시나 탐독할 리는 없습니다. 경찰 정보분야 최고의 엘리트가 취합해온 정보를 비서관이 거르고, 수석이 걸러서 비서실장에게 보고한 것이 그 문건이었습니다. 언론사에서도 현장 취재기자가 풍설을 모으러 다니지 않습니다. 그런 풍설을 담당 팀장이나 데스크, 더군다나 국장에게 보고하지는 않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로 의심받아온 정윤회씨가 지난해 7월19일 경기 과천시 주암동 서울경마공원에서 딸이 출전한 마장마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과천/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본질은 대통령 측근들의 전횡과 권력투쟁, 그리고 비리 의혹입니다. 그런 중차대한 사건을 문건 유출 사건으로 뒤바꾸려는 걸 보니 1992년 초원복국집 사건이 떠오릅니다. 김기춘 실장은 당시 이 사건에서도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안기부 분실장에서 교육감까지 부산의 기관장들이 모두 모인 초원복국집에서 이렇게 말하며 관권 개입을 독려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지면 모두 영도다리에서 뛰어내리자.” 그러나 이 관권선거 공작 사건은 정권과 검찰과 족벌언론의 합작으로 초원복국집 도청사건으로 성격이 뒤집어졌습니다. 검찰은 기관장들을 수사하는 게 아니라 회동 내용을 폭로한 사람들을 잡아들였습니다.
사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단언한 바에 따르면, 감찰 문건의 내용은 쓰레기입니다. ‘단 1%도 맞지 않는다’는 유언비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이들이 이 쓰레기의 유출을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증권가를 떠돌건 청와대로 흘러들어왔건, 쓰레기는 쓰레기입니다. 청와대를 거쳐 갔다고 쓰레기가 국가비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시중에 다 떠돌던 것이니 더더욱 비밀일 순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또 누군가 써준 대로 이렇게 읽었습니다. “(문건을) 내부에서 그대로 외부로 유출시킨다면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갈등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해 이렇게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지에 대해 조속히 밝혀야 한다.” 쓰레기를 버렸는데, 어떻게 나라가 혼란스러워집니까.
기밀누설, 국기문란 운운하니, 또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원숭이 수준의 기억력만 있어도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2년 전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캠프’에서 저지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왜곡유출사건 말입니다. 당신의 참모들은 지난 대선에서 1급비밀로 규정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빼내 재미를 톡톡히 봤습니다. 그냥 유출한 게 아니라 내용을 악의적으로 편집까지 했죠.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방한계선 포기를 약속했다는 것이고,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그때 무엇을 했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졸지에 노 대통령과 문 후보는 김정일의 ‘꼬붕’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화록 왜곡유출사건은 현재 재판이 진행중입니다. 검찰은 장본인인 정문헌 의원에 대해 벌금 500만원의 약식기소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재판부가 정식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25일 결심공판에서도 벌금 500만원을 구형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전체적인 발언 내용을 허위로 단정하기 어렵고, 일부 국민적 알권리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검찰의 이런 기준에 따르면 이번 문건 유출은 아예 수사 대상도 될 수 없습니다. 문건의 내용은 풍설에 불과하니 국가 기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본다면 선의의 제보자에 의한 보도는 당연한 일입니다. 대화록 왜곡유출사건과 함께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하니, 검찰로서는 참으로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설사 상시들의 생각이라도 대통령이 그렇게 엄명했으니, 또다시 악마의 계교라도 끌어내야겠지요. 국민이야 조삼모사 고사 속 저공의 원숭이와 같은 존재이겠거니 믿고 들이대지 않겠습니까.
지록위마의 고사로 돌아가면, 조고가 호해를 능멸하며 전횡하는 사이 전국에선 반란이 일어납니다. 유방의 군대가 함양으로 밀고 올라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자영을 새 황제로 옹립하지만, 제국의 침몰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조고도 주살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