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관이 서울 광화문 근처 효자동 통인시장 인근에 있는데
맘먹고 가 봤더니 평일이라 관람객이 별로 없더군요.
토요일은 1시까지 하고 일요일은 쉬니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방문할
기회가 별로 없는 듯....아니면 기념관 측이 처음엔 문을 열었다가
관람객이 역시나 별로 없어서 그냥 쉬는 것일 수도 있고요.
다 아시다시피, 제가 존경하는 분이고
명동 일대의 땅이 그 집 형제들 것이었답니다.
그러나 나라가 넘어가자 다 팔고 만주로 육형제가 이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교육하고 독립운동하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이시영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욱 존경하게 되는 인물이 이회영 선생과 그 형제들입니다.
조선의 권문세가의 후손으로 태어나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다가
나라를 잃자 모든 재산과 명예를 버리고 만주로 가서
만년에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눈물겨운 가난 속에서 독립운동하다가 떠나갔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가장 안타까운 점 중 하나는 그 분의 죽음에 조카가 연루되어 있다는 겁니다.
조카가 일제에 밀고해서 이회영 선생이 체포되고 취조당하고 고문당하다가
감옥에서 옥사했습니다.
물론 그 조카는 독립운동가들의 손으로 처단했지만, 비극적인 근대사의
한 장면입니다.
독립운동은 원래 비밀 암호를 쓰고 철저히 목
숨걸고 비밀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질 않아요. 그래서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희미해지는 것이 더 안타깝고요.
근처에 있는 박노수 화백 미술관(박노수 화백 이 72년에 사서 살던 정원딸린 집입니다-
그런데 박노수화백이 사기 전에는 윤덕영이라는 친일파가 딸을 위해 지은 집이라고
안내 현판에 쓰여 있더군요)에 들렀어요. 박노수 화백이랑 윤덕영은 상관없는 사람들이지만
그 집이 윤덕영이 지은 집이라는 걸 감안하고 보니 일제시대 때 참 서양풍을 도입해
세련되게 지었더군요.
비교가 되었어요. 한 집안은 대단한 부를 포기하고 만주로 넘어가
가난과 고난의 길을 자청하고 한 사람은 나라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며 그런 서양풍 집이나 짓고
프랑스풍 별장이나 짓고 살다가 갔네요.
우당 기념관이 조금 드라마틱한 요소를 가미한다면 관람객이 더 많아질까,
우당 선생에 대한 인지도가 낮아서 발길이 뜸한 걸까 생각하다가 집으로 왔습니다.
이덕일 씨 책에 보면, 조선 말 권력을 독점한 노론이 결국은 나라를 팔아먹고
노론이 팔아먹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소론(우당 선생 일가는 이항복 선생의 후손으로 소론에 속합니다)
과 남인들(예를 들자면 권
력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안동 남인들이 맹렬하게 독립운동했습니다
안동 임청각의 이상룡 선생 일가도 집 처분하고 만주로 떠났지요)이 처절하게 투쟁했다고 나오는데
아이러니하지요.....
나라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고 권력을 쥔 이들은 나라 팔고
권력에서 소외되어 배고픔까지 겪었던 사람들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