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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이어짐)
그러나 실제의 카프카의 삶은 달랐다. 그 곳에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은 <새롭게 시작해야만 함>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그곳에서, 그는 매번 시작 속으로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삶을 활력 있게 만드는 문명 전체를 그가 모든 순간에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한명의 전형적인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삶에 유용한 지식들과 의미연관들로부터 튕겨져 나온 한 명의 벌거벗은 인간으로서, 일상이라는 보호막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로서.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산책 나가기 전에 씻거나, 빗질 같은 것을 해야만 하는 것 – 이것은 이미 충분히 번거로운 일입니다만 – 뿐만 아니라, 옷을 꿰매고, 부츠를 깁고, 모자를 만들고, 지팡이를 높이에 맞게 수선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산책 나가기 전에 갖춰야 할 모든 필수적인 것들이 매번 그에게 다시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이 모든 것을 잘 해내지는 못하지요. 아마도 (사람들의) 몇 겹의 줄이 늘어져 있어야 하겠죠. 그렇지만 예컨대 도랑 위에서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무너지고, 그는 부서진 파편들과 돌들과 함께 벌거벗은 채로 서 있습니다…”
카프카는 시작함을 사랑했지만 한편으론 결국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닌, 습관적인 삶 속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인해 방황했던 또다른 인간의 현대적인 원형으로서, 막스 프리쉬의 소설 속 인물인 “슈틸러”가 있다.슈틸러는 조각가로 실패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의지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으며 아내인 율리카와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다른 사람으로써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슈틸러는 미국으로 도피한다. 후에 그는 다른 이름으로 귀향했지만, 그는 “슈틸러”로 체포된다. 그가 남긴 습작의 첫번째 문장이자 이 소설의 시작이기도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슈틸러가 아니다”. 소설의 논리는 그러나 결국 백일하에 드러난다: 새로운 시작을 찾아 떠났던 슈틸러는 결국 그의 과거에 의해 따라잡히고 만다. 과거란 무엇인가?그것은 하나의 고유한 인간이 그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내는 정체성이다. 슈틸러는 급진적인 시작을 원했다. (그러나) 그가 고통 속에서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그는 오로지 그 어떤 무엇과 함께만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을 받아들일 때에만 그는 그 자신과 함께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말이다. 새로운 시작은 그가 그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지 않은가?
여기 몇 해 전에 발굴된, 그러나 그동안 거의 다시 잊혀져 버리고 만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1945년 5월 2일에 뤼벡에서 한스 슈베르테라는 사람이 관청에서 등록하면서 동독 지역에서 그의 주민 서류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사람은 1909년에 태어난 독문학자이자 친위대 장교인 한스 슈나이더 박사이다. 그는 “선조의 상속인”이라는 힘러 재단의 “독일적인 학문의 진격” 이라는 분과의 책임자 였다. 이곳은 다카우 강제 수용소에서 생체 실험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이 슈나이더 박사는 한스 슈베르테로서 새로운 삶을 매우 성공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애호받는 대학 선생이자 명예교수 였으며, 70년대 자유주의 대학 개혁의 선봉자였다. 학자로서 그의 문예사적인 저작은 그의 전공인 독문학의 현대화된 정신의 모범례로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한스 슈베르테 교수가 한스 슈나이더 박사로도 역시 전후 독일에서 자신의 캐리어를 성공적으로 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럴 수 있다. 여하튼 그에게 있어 외적인 정체성 전환은 공적인 치욕과 속죄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었다.
슈베르테/슈나이더 경우에서 진짜로 놀라운 점은 이 정체성 전환이 공공연하게 단순이 외적인 것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슈나이더는 그 스스로 자신의 내적인 삶을, 슈베르테로서의 내적인 삶에 덧붙였다. 이러한 내적인 덧붙임을 학습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너무 갑둑튀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슈베르테는 전이 과정이라고 할 말한 것이 거의 없이 슈나이더 박사를 벗어버렸다. 인종 이론가에서 그는 거의 하루 밤 만에 민족 문학의 비판가가 되었다. 슈베르테는 외적인 환경을 통해 껍질을 벗어버리듯이 탈피 하였다. 정체성 전환을 통해 그의 인격이 파괴된 것이라 아니라 그를 덮고 있던 수치가 파괴되었다. 그동안 슈베르테/슈나이더 교수는 사망했다. 그는 아마 죽을때 까지 슈베르테로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담 슈나이더 박사는 어디에 남아 있을까? 어떻게 슈베르테 교수는 그가 한동안 그 사람이었던, 슈나이더 박사와 함께 살수 있었을까? 내적인 긴장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슈베르테의 저술들을 보면 역할 놀이와 가면극의 문제에 관해 천착하는 단락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나온다. 사실상 ‘슈베르테’는 ‘슈나이더’를 위한 마스크 그 이상이었다. 더 잘 들어맞는 것은 ‘꼭두각시에서 꼭두각시에로’ 라는 그림이다. 슈베르테의 인격은 슈나이더의 인격을 감시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하나의 인격 속에 다수의 인격을 위한 자리가 마련될 수 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