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런 시작함의 즐거움을 모른단 말인가? 새로운 사랑, 새로운 일자리, 새해, 새로운 시간. 역사 속에서는 이런 새로운 시작이 ‘혁명’ 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비록 그 이름값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새로 시작하게 하는 것처럼 활활 불타오르게 하던 (혁명의) 순간만큼은 여전히 신화로 남아 있다. 바스띠유 감옥의 습격, 겨울 궁전에 몰아닥친 폭풍. 장벽의 열림. 이러한 순간들은 영점 상황의 파토스와, 우리가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를 머금고 있다.
너무 큰 시작들이 있다. 하나의 사랑 이야기는 거기에서 더 이상 자랄 수 있는 것이 없는 시작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그 이야기들은 마치 시작의 힘 속에 그것이 다 포함된 것처럼 길게 지속되어, 결과적으로 불가피하게 시작의 끝이 끝의 시작이 되고 말것이다.
다른 시작들은 더 일상적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책 읽기를 시작한다. 그 독자에게는 지금껏 읽어왔던 어떤 내용 연관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읽었던 부분을 다시 뒤적일 필요가 아직은 없다. 모든 것들이 여전히 문장들 앞에 놓여 있으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두루마기처럼 펼쳐질 것이다.
모든 진정한 시작 안에는 변화의 기회가 숨겨져 있다. 왜 새로 시작하는 것들이 유혹적인지는 자명해 보인다: 사람들은 뒤에서 자신을 묶고 있던 귀찮은 것들을 기꺼이 떨쳐내고 싶어한다- 그가 연루된 수천가지의 것들, 그의 이야기와, 전통들 말이다. 시작의 즐거움은 어떤 감정에 대한 반응이다: 사람들은 사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시작은 어렵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그 어떤 것도 새로운 시작만큼 북돋아주고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것도 없다. 새로운 시작은 자유의 본질에 속한다. “모든 새로운 시작에는 마법사, 우리를 보호해주며 우리를 살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법사가 내재되어 있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시 “계단”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문학은 특히 시작함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문학은 삶의 첨예함이라는 연관 관계하에서 하나의 잠재적인 행동이자, 시험적인 행동이다. 작가는 다른 사람 혹은 자기 자신의 인생 편력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삶의 다른 여정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이미 이런 상상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는 관습적인 삶의 상황과 삶의 그렇고 그런 추후 행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험해 본다. 이렇게 이해된 문학은 그 테마가 무엇이든 간에, 새로운 시작의 표현이다. 그러나 문학은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작이라는 요구를 기꺼이 자신의 테마로 삼는다.
시작함에 관한 유명한 저서가 바로 카프카의 소설 “성” 이다. 스스로 “내 삶은 태어남의 순간에서의 망설임” 이라고 말했던 카프카는 그의 소설의 주인공인 토지측정기사 K 로 하여금 새로운 시작을 시험해 보게 한다. 과거 이력도,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채, K 는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성 밑의 어떤 마을에 발길을 들여 놓는다. K 는 아직 (그곳의) 친숙함, 습관, 혹은 문화적 자명성에서 기인하는 인지적인 무뎌짐의 법칙에 놓여 있지 않다. K는 여전히 익숙한 세계의 끔찍함을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 자의 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가 그 세계 안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시초적인 시선은 카프카적 글쓰기의 매력, - 독자인 우리들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매혹되는 - 매력을 만들어 낸다. 카프카는 글쓰기 속에서 행복감을 느꼈는데, 왜냐하면 시작할 수 있음이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