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한국일보 : [36.5도] 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

내탓이오 조회수 : 1,359
작성일 : 2014-09-08 03:00:01
http://hankookilbo.com/m/v/421a11a078824492965b19042e028346

전략........

약자들의 따스한 연대를 누구나가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죠” 같은 대사를 실생활에서도, 허구에서도 수시로 들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많은 문장의 주어로 곳곳에서 발화됐고,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같은 위대한 인문정신도 저잣거리에서 빈번히 설파됐다. 이제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피식 웃음이 나는, 풍속극에나 등장할 법한 사어(死語)들이지만, 말로라도 그러던 시절이 어쨌든 있기는 했다.

이제는 누구도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거나 선언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의 ‘약자-됨’은 결단코 은폐되어야 할 존재의 치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갑과 을. 나는 내 자식이 갑이 되길 바래.” 정성주 작가가 이태 전 쓴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 나오는 시대를 꿰뚫는 명대사다. 그러므로, ‘갑-되기’가 시대정신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대부분은 약자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들에 의해 자행된다. 윤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한 28사단의 장병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 보라며 닭다리를 뜯고 있는 노인들, 한때의 피해자가 가장 극렬한 가해자로 돌변하는 왕따와 학교 폭력, 지역차별과 여성비하를 토사물처럼 쏟아놓는 극우 청년단체…..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 ‘나는 너처럼 비명에 자식을 잃지 않았다’, ‘나는 이제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지역 출신이 아니다’, ‘나는 여성이 아니다’가 이들에겐 일말의 권력, 알량한 권세가 된다. 모두가 갑이 되길 원하고, 기적적으로 모두가 갑이 되는 곳. 아이부터 어른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갑이어서 슬픈 땅.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추하다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너무도 성실하게 내면화했다. 약한 것은 딱하고 가여운 것이 아니라 못나고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이제 약자조차도 약자의 마인드 따위는 필사적으로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영세 자영업자지만 정치의식은 대기업 CEO인 ‘사장님’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며 노동을 착취하고, 평생을 서울내기로 살아온 중년 부인도 지배계급을 선망하며 거침없는 지역 차별 발언을 쏟아낸다. 권력이라곤 가부장 권력밖에 가져본 적 없는 가난한 노인들은 어버이의 이름으로 정신적 매질을 멈추지 않고, 성 권력뿐인 절망한 청년들은 칼날보다 잔인한 언어로 여성을 능멸한다. 내가 약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제물을 찾아 물고 물리는, 갑의 표식을 이마에 붙인 을들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이 바로 여기다. 이것은 소수의 흉측한 사람들이 벌이는 이상행태가 아니라 강한 것만을 욕망하게 만든 이 사회의 아비투스가 초래한 총체적 정신병리다. ‘얕보이면 죽는다’는 공포, ‘당하는 게 죄인’이라는 좌절이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이 그악스런 비극은 종식될 수 없다.

미시권력의 끊임없는 비교우위를 통해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동안, 강자들의 거악은 쉬이 잊혀졌다. 강자들의 태평성대를 만들어준 건 그러니까 바로 우리 약자들이다. 아마 지그시 웃고들 있었겠지.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추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추한 것이 추한 것이다. 그게 누구든, 약자를 돕는 자가 아름답고, 약자를 혐오하는 자가 추한 것이다.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사실은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에게라도 가르치는 수밖에.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IP : 180.224.xxx.207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뿅뿅이
    '14.9.8 10:02 AM (223.33.xxx.28)

    좋은 글이네요.

  • 2. ..
    '14.9.8 10:57 AM (116.39.xxx.34)

    다른 싸이트에서 올려진 것 보고 읽었는데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 3. ㅇㅇ
    '14.9.8 11:07 AM (61.254.xxx.206)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들에 의해 자행된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글이네요.
    내 자식은 약자를 보듬을 줄 아는 인간이 되도록 가르쳐야겠어요

  • 4. ..
    '14.9.8 12:41 PM (223.62.xxx.64) - 삭제된댓글

    저장...

  • 5. 저도..
    '14.9.9 1:23 AM (118.223.xxx.153)

    잘 읽었어요.

  • 6. 서글픈 현실
    '14.9.9 10:39 AM (223.62.xxx.87)

    누구나 악을 행하지않고는 살수없고
    시민들이 어쩔수 없이 사기꾼이 되는 나라가
    세상에 있다면,
    목을 매달아야 할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악인이 되지 않을수 없게
    강제하는 자다. - 루소

    만약에 있다면 하던 나라에 살고있는
    우리가 안쓰러울뿐입니다.

  • 7. 비갠 풍경
    '18.2.18 8:21 PM (58.235.xxx.6)

    명문이네요. 4년 전 글인데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나? 자문하게 되네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444572 이에야스의 어록이라는데 3 ㅁㅁ 2014/12/11 1,290
444571 나이 33, 유학길 오릅니다 22 피스타치오1.. 2014/12/11 5,008
444570 차분하고 고급스런 사람 10 행복 2014/12/11 7,721
444569 나와 뭔가 있을 것 같은 이성은 느낌이 오는 분? 2 ... 2014/12/11 1,452
444568 내년이면 보험료 오른다며 가입 종용하는 친구 17 소중한 아들.. 2014/12/10 1,873
444567 당황해서 태블릿 암호 못풀었다고 보도자료돌린거 명예훼손 아닌가요.. 3 ........ 2014/12/10 1,393
444566 올케 선물 아이디어 좀 주세요. 5 도움요청 2014/12/10 1,105
444565 얼굴에 크림바를때 순서가 무언지좀... 3 /// 2014/12/10 853
444564 소개팅한지 25일째입니다. 7 소개팅 2014/12/10 3,060
444563 부모님 다돌아가신분 계신가요.. 15 해피 2014/12/10 3,999
444562 학교 기숙사 룸메가 자주 방을 떠나는데요..왜이럴까요? 5 ... 2014/12/10 2,088
444561 안정환 성격 젊었을때도 지금과 비슷했나요..?? 8 .. 2014/12/10 5,446
444560 6살 딸하고 대화하다 당황한 일이 있어 글 올려봅니다. 10 엄마고민 2014/12/10 2,302
444559 급!싱가포르서 인기있는 한류스타는 ? 4 궁금이 2014/12/10 2,248
444558 특이한이름 평범하게 개명해보신분 있나요? 2 ㅇㅇ 2014/12/10 1,369
444557 대한항공, 기자에게 신문 2400부 착불로 반송 5 Rrrrr 2014/12/10 4,151
444556 경기도.서울.전라도에 수제비 맛있는집 아시면 추천좀 해주세요 2 .. 2014/12/10 964
444555 키 더못크나요 1 키컸으면좋겠.. 2014/12/10 896
444554 건성피부에 괜찮은 기초~~ 4 화장품 2014/12/10 1,669
444553 올겨울 큰추위없다더니... 5 구라청 2014/12/10 2,594
444552 해 없고 따뜻한 날이 좋으세요, 햇빛쨍쨍 강추위인 날이 좋으세요.. 5 ........ 2014/12/10 1,081
444551 금리 오르면 금값에도 영향이 있을까요? .. 2014/12/10 1,208
444550 항공권 예약 관련 질문.. 제발좀 부탁드려요.(처음이라서..) 3 백만년만의외.. 2014/12/10 800
444549 일본이 문제가 아닌듯합니다 5 안전 2014/12/10 1,351
444548 흰색가죽 지갑에 유성 사인펜이 묻었어요 지울 수 있나요? 3 궁금이 2014/12/10 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