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접대 동영상에 나오는 남녀는 김학의 전 차관과 나다. 거짓이 인정되는 현실을 보고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검찰에서 윤씨와 김 전 차관을 불러 나와 대질 수사해 두 사람의 범죄를 처벌해달라.”
지난해 김학의 당시 법무부 차관이 연루되었다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원주 별장 성접대 사건’의 피해 여성이 최근 법무법인 다올(대표 변호사 박찬종)을 통해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성접대를 강요한 뒤 동영상을 촬영했다는 건설업자 윤 아무개씨에 대해서는 성폭력범죄특례법 위반(카메라를 이용한 촬영)과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상습 성접대 강요)를, 김학의 전 차관에 대해서는 성폭력범죄특례법 위반 혐의를 각각 적시했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초 김 전 차관과 윤씨가 성접대 사실과 동영상 촬영을 부인한다는 점과 ‘동영상 속 여성의 신원을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두 사람 모두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동영상 속 등장인물이 본인이라고 주장하는 이 아무개씨가 나타나 검찰에 고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이씨는 동영상 속 여성이 자신이라는 근거로 2008년 초 촬영 당시 생일을 맞아 단발머리를 했던 점과 원본 동영상에서 확인한 얼굴과 옷차림이 자기가 분명하다는 점 등을 들었다. 이씨는 고소장을 통해 윤씨의 꾐에 빠져 2006년 7월부터 2008년 2월까지 1년6개월 이상 고위층 성접대에 동원됐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소장에 김학의 전 차관 외에도 윤씨와 사업 관계로 얽힌 대기업 간부 및 중견 건설사 회장 등 5명의 실명을 적시했다. 원주 별장 말고 윤씨가 서울에 마련해준 전셋집에서도 강제로 성접대를 해야 했다는 것이다.
특히 김학의 전 차관과 동영상이 찍힌 대목에 대해서는 “윤은 고소인에게 약을 탄 술을 강제로 먹이고 김학의는 고소인 뒤에 서서 고소인을 준강간했으며 윤은 이를 촬영했다. 그다음 날 윤은 고소인을 방과 수영장에서 강간했고 (반항하자) ‘어제 너 뒤에서 X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이 X야. 법조인인데 엄청 무서운 분이야.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내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개가 되는 거야, 알았어?’라며 고소인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이 일을 발설하면 세상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라고 적었다. 심지어 윤씨는 이씨에게 별장에서 기르던 개와 ‘수음’까지 하라고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이씨가 동영상 속의 주인공이 자기라고 밝히면서 윤씨와 김 전 차관을 고소하고 나서자 일각에서는 뒤늦게 나선 이유에 대해 의아해하는 반응도 나온다. 그런데 사건의 흐름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이씨가 이번 고소에 이르기까지 진실을 드러내고자 사방으로 노력해온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2일 검찰이 김 전 차관과 윤씨의 성접대 혐의에 대해 무혐의 처리하자 이씨는 청와대 신문고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개 진정서를 올렸다.
“각하, 살고 싶습니다. 제가 다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주세요. 김학의 전 차관을 덮으신다면 윤까지 죗값을 받지 않을 것이며 (…) 그들의 가정을 지키고 그들의 면상을 지키기 위해 그리 숨어 있을 때 피해자인 전 제 가족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더 이상 내 식구 감싸기라는 검찰 기사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억울함에 더 많은 진실을 국민들 앞에 하소연하며 한을 풀기 전에 스스로들 국민 앞에 나와 심판받길 원합니다. 각하, 전 담당 검사님께 간절한 제 마음을 편지로 보냈습니다. 부디 그 편지가 쓰레기통으로 가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매일 밤 삶과 죽음의 길에서 밤을 새웁니다. 전 윤의 협박과 폭력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님의 권력이 무서웠습니다. 윤은 경찰 대질에서까지 저에게 협박하며 겁을 주었습니다. 각하, 범죄 앞에선 협박도 폭력도 권력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들 앞에 보여주세요. 제가 용기 내어 잘 버티고 잘했다고 해주세요. 국민들이 지금 각하께 하는 쓴소리를 솔로몬의 지혜로움으로 이 사건을 해결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씨의 이런 절박한 호소에도 청와대와 검찰에서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결국 이씨는 살아야겠다는 필사적인 각오로 이번에 동영상 속 인물이 자기라는 것을 드러내며 두 사람을 고소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시사IN>은 이씨의 고소를 계기로 지난해 검경 수사팀에 불려가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윤의 덫에 걸린 여인들’을 두루 접촉해보았다. 검경이 확보 중인 김학의 전 차관이 나오는 동영상 사본도 입수해 검증했다. 또 성접대에 동원된 일부 여성들을 상대로 윤씨가 욕설과 협박을 하는 육성 녹음파일도 입수했다.
피해 여성, “땅꾼 앞의 뱀 신세였다”
그 결과 피해 여성들의 증언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윤씨를 알게 된 초기, 윤씨가 환각제나 최음제 같은 약물을 투여해 여성들을 환각 상태에 빠뜨린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었고,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협박함으로써 고위층 상대 성접대 노예로 삼는 올가미를 씌웠다는 것이다.
먼저 윤씨와 9개월 동안 만나면서 18억원대 돈까지 뜯긴 뒤 서울 서초경찰서에 고소하면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한 최초의 신고자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씨의 고소장을 보니 내가 윤에게 당한 것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소름이 돋았다. 99%가 내가 당한 수법이었다.” A씨에 따르면 윤씨는 점찍은 여성에게 접근해 환각 상태에서 성관계를 맺은 뒤 동영상을 촬영해두고 말을 듣지 않으면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며, 자기 배후에 고위 검사가 있으니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다고 큰소리치곤 했다. 또 성접대를 거부할 경우 촬영해둔 동영상에서 여성의 사진을 갈무리해 친척이나 지인에게 보내 협박하는 방법을 썼다. 그녀는 윤씨가 점찍은 여성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땅꾼 앞의 뱀 신세’라고 표현했다.
A씨는 검찰 조사 과정과 언론 보도로 인해서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사실대로 다 말했지만 검찰에서는 윤과 합의하라고만 종용했다. 언론도 성접대를 강요받은 피해 여성들을 마치 윤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 것처럼 양비론으로 보도해 억장이 무너졌다. 검찰과 언론을 믿을 수가 없다. 지금도 윤은 풀려나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그가 입을 열면 다칠 유명 인사가 한둘이겠나. 나 같은 피해자는 두려워서 더 이상 말하기가 겁난다.”
이번에 김학의 전 차관을 고소한 이씨 외에 지난해 검경 조사 과정에서 또 다른 여성도 김 전 차관을 상대로 성접대에 동원됐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B씨는 친구와 별장에 놀러 갔다가 윤씨의 강요로 김학의 전 차관에게 수차례에 걸쳐 성접대를 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윤씨 등과 합의하면서 김 전 차관과 윤씨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B씨는 기자의 면담 요청에 “검경 조사에서 다 말하고 끝난 일이다. 다시는 그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일단 조사 시작하지만…소극적인 ‘검’
취재 과정에서 <시사IN>은 문제의 동영상을 입수했다. 경찰은 지난해 110일간의 조사를 거쳐 7월18일 동영상 속 인물이 김학의 전 차관이라고 확정해 발표했다. ‘윤의 여자들’ 30여 명에게 일일이 확인 진술을 받고, 동영상 원본을 입수해 얼굴 및 과학적 성분 분석까지 마친 결과였다. 이를 토대로 김 전 차관과 윤씨에게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상 특수강간죄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윤씨에 대해서는 추가로 마약류관리법 위반, 건설산업기본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배임증재 등 10개 혐의를 적용했다. 특히 윤씨가 피해 여성에게 마약 값까지 뜯어내 필로폰을 구입한 정황을 확보한 경찰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마약 공급업자를 찾아내 윤씨에게 팔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송치 내용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윤씨가 피해 여성에게 성접대를 상습적으로 강요하고 김 전 차관과 여성 간의 성관계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의혹이나 필로폰 매수 등과 관련해서는 모두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이번에 이씨의 고소장을 접수받은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는 일단 지난해 수사한 자료들을 다시 검토한 뒤 고소인 조사부터 시작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이씨가 지난해 검찰에서 진술한 것과 달리 “동영상 속 인물이 나”라고 밝힌 점 외에는 새로운 내용이 없지 않으냐며 소극적인 분위기다. 이씨의 고소 사건을 대리한 박찬종 변호사는 “검찰이 이 사건을 또다시 묵살할 경우 법원에 재정신청을 내서라도 끝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관련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라고 말했다.
이씨의 고소로 다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김학의 전 차관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지난 1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어 현재 원주 별장에 사는 윤씨는 기자의 확인 전화를 받고 “통화하고 싶지 않다”라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