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978년도 11월, 당시로서는 꽤 늙은 노총각인 이놈과 역시 당시로서는 다 늙어 저잣거리에 내 던져 놔 봐야 입고 있는 옷이 괜찮으면 옷이나 벗겨갈 26살의 두 물 간 노처녀 마누라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제두도로 갔었다.
태어난 이후로 평생 처음 바다를 건너는 해외여행이자 신혼여행이었다.
지금이야 신혼여행 갔다 와서 그 다음날부터 목구멍에 거미줄을 치는 한이 있더라도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지만 당시로서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도 99%의 서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거나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세계일주의 신혼여행도 1%의 졸부들에게는 드물지 않게 있었던 시절이다.
그런 신혼부부가 한국을 떠날 때는 둘이서 떠났는데 지구를 한 바퀴 돌고 귀국을 할 때에는 뱃속에 하나를 담아 가지고 셋이서 귀국을 했다.
그 뒤 1992년에 다니던 직장 한전에서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 한전제주지사에서 20개월을 근무를 하게 되었다.
한전은 입사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초급간부 임용고시”라는 시험을 쳐서 평직원에서 과장으로 승진을 하게 된다.
그 초급간부 임용고시는 <시험>이라는 것이 승진을 결정하는 적절한 방법이냐를 떠나서 시험만은 흠 잡을 데가 없이 공정하고 깨끗했다.
4-5수는 보통이고 10수도 많았으며 대부분은 5수쯤에서 승진을 포기하고 평직원으로 정년을 맞는다.
별 자랑도 아니지만 이놈은 1979년 첫 번째 시험에서 승진을 했다.
그 다음부터도 몇 단계가 더 있지만, 그 다음 승진부터는 누구의 손금이 빨리 달아 없어지느냐에 따라 빨리 승진을 할 수도 있고, 이놈과 같이 손금이 멀쩡한 사람은 만년과장으로 끝나게 된다.
과장으로서 12년 안에 차 상위 직으로 승진을 못하게 되면 무능한 죗값으로 자기의 연고지(이놈은 서울)를 떠나 타 지역으로 무조건 전출을 가야만 한다. 그래서 1992년도에 귀양살이 케이스에 들었는데 기왕이면 좋아하는 바다낚시나 원 없이 해 보고자 제주를 선택해서 해외로 귀양을 떠났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주와 또 한 번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주워들었거나 눈으로 본 제주경험 몇 개만을 소개한다.
물론 제주출신이 본다면 검은 돌멩이 하나보고 한라산 다 보았다고 한다고 일소에 붙이겠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아는 대로만 얘기해 보겠다.
1. 올레 길
“올레”라는 말에는 본디 “길”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다.
“종로”, “을지로”라는 말에 “길”이라는 뜻이 들어 있듯이 “올레”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어떻게 하다가 어디 한적하고 경치 좋은 길을 여럿이 함께 걷는 것이 “올레”가 되었고, 또 어찌하다 보니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목적으로 일종의 시위나 행진을 하는 것도 “민주 올레”와 같이 “올레”가 되어버렸다.
제주에 가면 바람이 심하고 그 바람의 시달림으로부터 초가집을 보호하고자 돌로 울타리를 높게 싼 것을 볼 수 있고, 밭과 묘지도 그렇게 돌담을 쌓아 놓았다.
그게 자연친화적인 방법이고, 제주의 여건에서 제주 인들이 터득한 기막힌 과학이자 삶의 지혜였다.
우선 돌담을 쌓으니 바람으로부터 초가집, 묘지, 밭, 등을 보호할 수가 있고 넘쳐나는 돌을 한 군데로 가지런히 정리하여 척박하나마 자갈밭을 흙 밭으로 만들어 토지의 효용가치와 이용률을 높이는 방법도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초가집의 경우 돌담을 높이 쌓았어도 출입문은 틔워 놓아야 된다. 그러면 출입문으로 바람이 몰려 들어와 초가집을 아주 작살을 낸다.
그래서 출입문부터 큰 길까지 양편으로 또 돌담을 쌓았던 것이다.
그 양편으로 돌담을 쌓은 길이 직선이면 역시 바람을 막아낼 수가 없다. 그래서 울타리의 출입문부터 큰 길에 이르는 돌담길을 일부러 박근혜의 몸매가 “S라인”으로 죽여주게 생겼다는 것과 같이 꾸불꾸불 따-따불의 "S라인”길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올레”다.
그 돌담도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생각을 해 보면 거기에 또 제주 인들의 기막힌 지혜와 첨단의 과학이 깃들어 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자동차도 날아가고 빌딩도 주저앉는 판에 손으로 대충 쌓은 돌담이 견디겠나?
그렇지만 제주 돌담은 아무리 센 바람에도 끄떡없다.
태풍이 휘몰아치면 전봇대가 수백 개씩 한꺼번에 드러눕고, 간판이 날아가고, 시원치 않은 건물은 주저앉아도, 돌담이 쓰러지는 경우는 없다.
돌을 매끄럽게 다듬어 싼 것이 아니고 울퉁불퉁 생긴 그대로 쌓은 돌담이다. 돌과 돌 사이에 무수한 구멍이 나 있다.
우선 바람이 불어오면 일부는 돌 틈으로 빠져나가고 일부는 돌에 부딪혀 돌 주위에서 회오리바람이 되어 담을 밖에서 안으로 미는 힘으로 작용을 하고, 이미 구멍으로 빠져나온 바람은 꾸불꾸불한 구멍을 빠져나오느라 담 안에서 역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담을 안에서 밖으로 미는 힘으로 작용을 한다.
담의 밖과 안에서 바람이 비슷한 힘으로 밀어대어 담은 힘 하나들이지 않고 서 있을 수가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바람도 돌담을 빠져나오나 헷갈려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 회오리바람이 되어 초가집에 별 위해가 되지 않는다.
이게 현대의 첨단과학도 무릎을 칠 제주 돌담의 기막힌 과학이다.
이명박이 같은 삽질장이가 모양을 낸답시고 돌을 4각 지게 매끈하게 다듬어 쌓거나 돌 틈을 콘크리트를 처발라 틀어막으면 그 담은 태풍이 밀려올 때 4대강 보와 같이 주저앉고 만다.
2. 제주의 게 잡이
지금은 서해안의 갯벌도 거의 사라져 게를 잡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내가 어렸을 때는 충남당진에서 할머니를 따라 지금 한보철강에서 현대철강으로 변한 제철소가 자라잡고 있는 삽교천 하류에는 끝이 안 보이게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서는 갯벌 게구멍에 팔뚝을 쑤셔 박아 게를 잡는다.
그 게는 갯벌 색깔과 같이 잿빛의 희 누런색이다.
그런데 제주 게는 서해안의 게보다 훨씬 작고 제주해변의 돌과 같이 검거나 검은색과 붉은 색이 뒤섞여 있다.
제주에는 갯벌은 없고 한라산이라는 큰 바위덩어리가 하나가 있고, 해변에는 그 큰 바위 위에 한라산에서 떨어져 나온 잔돌들이 흩어져 있거나 일부는 모래밭으로 해수욕장이 있다.
그러니 제주 게는 서해안 갯벌의 게와 같이 구멍을 파고 게가 숨을 곳이 없다.
하루는 낚시를 하고 있는데 웬 더벅머리가 플라스틱 통을 하나 갖고 오더니 돌밭에 퍼질러 앉아 돌을 열심히 집어 던지고 있었다.
무엇을 하느냐? 고 물어봤더니 게를 잡는다고 했다.
그 더벅머리가 눈짐작으로 직경이 한 2미터 정도 되게 원을 그리며 열심히 원 안에 있는 돌을 원 밖으로 집어 던졌다.
마침 물때가 안 맞아 낚시도 안 되고 하기에 나도 낚싯대를 팽개치고 손을 보탰다.
돌무더기 원이 점점 줄어들자 돌 틈에 있던 게들이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들어 농촌 같던 일구밀도(게 밀도)가 출퇴근시간대의 전철안과 같아졌다.
마지막 큰 돌 두 개가 남자 게들이 모두다 그 돌에 달라붙어 게 덩어리를 이루었다.
더벅머리가 양손으로 게를 움켜쥐어 통에 쓸어 담자 말 그대로 일망타진 이었다.
아- 세상에 이런 기막힌 게 잡는 방법도 다 있구나!
절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구럼비바위가 없어졌듯이 제주의 해변도 점점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아마 제주에서도 저런 게 잡이 방법은 70대 이상의 어르신들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것이다.
3. %$#@%^&*%
제주에 간지 얼마 안 되어 물때가 알맞은 토요일 일찍 퇴근을 하여 낚시가방 들러 메고 허겁지겁 내가 포인트로 점찍어 놓은 갯바위로 달려가는데 웬 할머님 한 분이 조그만 움막 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도 토박이 원어로 %$#@%^&*%이라고 큰 소리로 떠들고 계셨다.
무슨 소린지는 몰라도 좋은 소리는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낚시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자 먼저 와 있던 40대쯤의 나와 비슷한 연배의 남성이 지금 할머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어왔다.
영어보다도 더 어려운 할머님 말씀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모른다고 하자 그 남성이 나를 보고 보아하니 제주에 처음 오신 것 같은데 저 위의 움막 같은 집은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이라고 했다.
그리고 제주 남성들은 저 앞길로 지나다니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했다.
“아차-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때는 늦었다.
그러면서 아까 할머님이 하신 말씀이 “대갈빼기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남의 늙은이 것 공짜로 볼려고 든다.” 고 하신 제주도 원어란다.
그런 욕먹어도 쌀 짓을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제주토박이 남성이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지금과 같이 낚시TV도 없었던 시절 그와 절친한 낚시친구가 되어 제주바다낚시에 대한 많은 정보와 노하우를 단기간 내에 배울 수가 있었다.
4. 제주 인에게 가장 심한 욕(모욕)
12-13세기 무렵 세계를 휩쓸다시피 제패한 몽고(원나라)를 손바닥 만 한 고려로서는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과 같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고려가 아니었다.
강화도로 건너가서 한강보다도 좁은 해협을 버팀 막 삼아 대장경을 파서 부처님께 “몽골군을 물리쳐 주십사!” 기원을 하며 40년 가까이 버티다 강화가 함락되자 진도로 쫓겨 가고, 다시 진도가 함락되자 제주도로 건너가서 끈질긴 저항을 하다 끝내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에게 항복을 한 것이 아니라 장열하게 옥쇄를 했다.
이긴 몽골군으로서도 피해는 삼별초군 못지않았던 것이다.
원나라가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아시아 유럽대륙을 통 털어 부마국의 지위일망정 국호와 왕제를 허락받아 준 독립국의 지위를 누렸던 나라는 고려가 유일하다.
그렇게 끈질기게 저항하던 제주를 함락한 몽골은 한라산비탈의 드넓은 초원에 기마병이 타고 달릴 말을 풀어 길렀던 것이다.
그때 몽골군이 제주인 학대가 자심했던 것 같다.
고려에 대한 화풀이를 제주인 들이 다 떠 앉았던 것이다.
삼별초가 최후까지 저항을 한 유적지도 남아있고, 제주인들 머릿속에는 몽골 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이 지금까지 유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아마 그때 수많은 제주여인들이 몽골군의 성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다.
제주 인들이 그들 간에 심한 언쟁이 벌어졌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던지는 치욕적인 욕이 바로 “몽고 놈의 새끼”다.
물론 “몽고 놈의 새끼”라고 하지 않고 제주 원어로 하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지금은 잊었다.
그 제주가 4.3 사건으로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몽골에 대한 원한은 잊혀 진 역사의 단편이고, 4.3의 피눈물은 현재도 흐르고 있는 핏물이다.
누가 제주 인들의 눈에서 그 눈물을 씻어줄 것인가?
아-!
아름다운 제주!
그러나 슬픈 제주!
구럼비 바위에서는 지금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