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루스벨트 만나 “일진회 대변인” 자처
대한제국 부정하고 반러·친일 노선 드러내
최근 <한겨레>가 당시 미국 신문기사들을 검색한 결과, 이승만과 윤병구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하고, “일진회의 대변인”을 자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하는 등 일본 쪽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사실도 나타났다. 옛 독립협회, 동학 계열 세력들이 1904년 결성한 일진회는 당시 한반도에서 영향력 있는 대중조직으로 활동했으며, 1905년 11월 일본에 조선의 외교권을 맡기는 데 찬성하면서 본격적인 친일단체로 바뀐다. 이 자료들은 미 의회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신문검색 서비스(chroniclingamerica.loc.gov)를 활용해 찾아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 1905년 8월4일치 7면에 실린 ‘오이스터 베이의 한국인들’이란 제목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이 기사는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온 윤병구와 이승만이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할 것을 위임받았다”고 말한 것을 인용·보도했다. 기사는 또 이들이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며 “수천명의 회원들로 이뤄진 일진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곧 국무를 장악하고 정부 구실을 할 것”(will take hold of affairs and conduct the government)이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전했다.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 8월8일치는 “윤병구와 이승만은 자신들이 러시아 영향력 아래 놓인 황제를 대표하고 있지 않으며, 힘있는 단체인 ‘일진회’의 대변인이라고 밝히고 있다”고 했고, <워싱턴 타임스> 8월4일치는 “이들은 ‘일진회’로 알려진 한국의 거대 진보정당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매체들은 러시아와 일본 두 열강의 위협을 함께 우려하면서도 일본에 더욱 우호적인 이들의 태도에 주목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러시아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고, 우리는 이 전쟁(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는 윤병구의 말을 빌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은 전자(일본)를 주인(masters)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거의 없다”고 보도했다. <스타크 카운티 데모크라트>는 같은 내용의 기사에 아예 ‘한국은 삼켜질 것을 주저하고 있지만, 러시아보다는 일본의 목구멍을 선호한다’는 제목을 달았다.
이런 자료들은 기존 ‘고종 밀사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윤병구·이승만이 루스벨트를 만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러 일본으로 향하던 육군 장관 태프트가 하와이 한인 대표인 윤병구에게 써준 소개장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뚜렷한 대표성을 내세우기 어려웠기에, 실질적 연관은 없지만 신흥 정치세력인 일진회를 내세워 취약한 대표성을 보강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 이들의 당시 노선은 뚜렷하게 ‘반대한제국, 반고종, 반러시아, 친일본’ 등이었다.
이승만은 자서전 등을 통해 “루스벨트는 ‘공식 외교 채널로 청원서를 보내라’고 했으나, 주미공사였던 김윤정이 ‘친일’로 돌아서서 여기에 협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기사들을 보면, 대한제국 관리인 김윤정으로서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부정하는 윤병구·이승만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대한제국과 황제를 철저히 부정하고 당시 이미 일본 쪽에 기울어져 있던 미국에 (이승만이) 일본 입장을 편든 것이, 제대로 된 ‘국권 수호’인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