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양반이에요?”
듣기 두려웠던 말이 귀에 꽂혔다. 세월호 사고가 난 4월16일 밤, 목포 한국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인양된 시신의 부모로 보이는 부부가 막 걸어 들어왔다. 말이 ‘걷다’이지 걸음도 채 옮기기 힘든 듯했다. 취재수첩과 펜이 부끄러워 자꾸만 손을 포개 가렸다.
...그때 김병규군(가명·17) 아버지가 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기자냐고요?” “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쓰세요. 병규 아빠인데요. 냉동고에서 꺼내서요. 제발 좀 따뜻한 곳에 옮겨가지고 이거(심폐소생술) 한 번만 해달라고. 그러면 내가 가슴에 묻고 간다고. 좀 해주세요, 네?”
그가 무릎을 꿇었다…
곁에 있던 다른 기자에게도 말을 건다. “○○신문 아가씨, 취재 잘 하더니 왜 안 써. 쓰라고, 제발. 우리 아들 왜 이 먼 병원까지 와야 돼. 가까운 데서 응급치료 하고 이리로 오면 되잖아. 여기 오는 동안이면 이거(심폐소생술) 할 수 있었잖아. (카메라를 가리키며) 이것 때문에 여기 온 거야? 말 좀 해줘, 기자 양반!” 뒤에 있던 김군의 어머니도 운다. “어떻게 부모들을 이렇게 종일 속이냐고요, 어떻게 오보를 그렇게 끊임없이 내보내느냐고요….”
어버이날 다음 날인 5월9일, 아이의 영정사진을 들고 청와대 앞에 온 유족들 곁에 서 있었다. 땡볕에서 대통령의 대답을 기다리던 오후, 낯익은 얼굴에 가슴이 철렁했다. 영정 뒤 검은 펜으로 적혀 있는 이름은 김군의 것이 틀림없었다. 부부는 그때처럼 울고 있진 않았다. 서로에게 몸을 기대기도 했다. 눈물이 마르는 동안 두 분이 어떤 시간을 견뎌냈을지 생각하니 아득했다.
‘힘없는 사람이라서 미안하다.’ 서울시청 분향소에 매달려 있는 노란 리본에 적힌 문구다. 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그간 물을 수 있는 ‘힘’을 어디에 썼는지 자문하면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하다. 책임 있는 이들에게 끈질기게 묻겠다. 언젠가 김군의 부모님을 다시 뵈었을 때, 또다시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기를.
어버이날 다음 날인 5월9일, 아이의 영정사진을 들고 청와대 앞에 온 유족들 곁에 서 있었다. 땡볕에서 대통령의 대답을 기다리던 오후, 낯익은 얼굴에 가슴이 철렁했다. 영정 뒤 검은 펜으로 적혀 있는 이름은 김군의 것이 틀림없었다. 부부는 그때처럼 울고 있진 않았다. 서로에게 몸을 기대기도 했다. 눈물이 마르는 동안 두 분이 어떤 시간을 견뎌냈을지 생각하니 아득했다.
‘힘없는 사람이라서 미안하다.’ 서울시청 분향소에 매달려 있는 노란 리본에 적힌 문구다. 사고 한 달이 지난 지금, 그간 물을 수 있는 ‘힘’을 어디에 썼는지 자문하면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하다. 책임 있는 이들에게 끈질기게 묻겠다. 언젠가 김군의 부모님을 다시 뵈었을 때, 또다시 부끄러움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기를.
기자님들....제발 부끄러운 기자가 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우리 잊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