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알 살람98호..이집트에도 '세월호'가 있었다너무도 너무도 닮은…참사가 된 침몰사고SBS | 윤창현 기자 | 입력 2014.05.03 11:45
몇 해전부터 가끔 저를 괴롭혀 온 수면장애가 몇 주전부터는 고질병이 돼 버렸습니다. 몸은 한국에서 수천 킬로미터 밖에 있지만 한시도 마음이 떠나지 않는 가슴저린 세월호 참사의 고통은 이 곳 카이로까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한국과는 7시간이나 시차가 나는 곳이라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소식이 있을까, 한 명의 아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하며 새벽마다 손을 더듬어 스마트폰을 열게 되더군요. 수많은 전쟁터와 피해자들을 만나고 취재해 왔지만 20년 가까운 기자생활 동안 언론인으로서 이렇게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게 한 참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 빼닮은 두 참사…이집트판 세월호 "알 살람 98호"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집트인들이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과 과거 이집트 언론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적여 봤습니다. 참사의 발단과 정부의 대응까지 세월호 참사와 너무나도 빼닮아 있었습니다.
최악의 침몰사고…최악의 대응
8년 전인 지난 2006년 2월 3일, 천 4백여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탑승한 여객선 알 살람 98호는 사우디를 출발해 이집트로 향하던 도중 홍해상에서 침몰합니다. 388명이 구조됐지만, 대다수가 사우디로 돈 벌러갔던 노동자들이던 이집트인들을 포함해 무려 천여명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알 살람 98호는 1970년 이탈리아에서 건조한 여객선이었는 데, 21년 뒤인 91년에 당초 설계였던 승객 천명과 차량 2백대가 승객 천 3백명과 차량 320대를 태울 수 있도록 대폭 변경됩니다. 무리한 설계변경으로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력이 떨어진 세월호와 비슷한 설계변경이 이뤄진 것이죠.
사고의 원인은 지금까지 알 살람 98호의 엔진 화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몇몇 생존자들이 엔진실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를 목격했고, 이후 재판과정에서는 출항 전 엔진이상이 있었고 선사와 선주에게 보고가 됐지만 이를 묵살하고 출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승객의 생사보다 중요했던 무바라크 심기 경호
이 사고가 이집트 국민들의 분노를 산 결정적 이유는 무바라크 정권의 무책임한 대응이었습니다. 사고 당시 무바라크 대통령을 포함해 정권 수뇌부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축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던 카이로 경기장에 있었습니다. 한창 경기의 흥이 오른 상태에서 살아 있는 파라오로 불리던 무바라크의 심기를 건드리기 주저했던 관료들은 알 살람호 침몰 사고에 대한 긴급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집트 당국은 결국 천 여명이 수장될 때까지 거의 아무런 구조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구조활동은 수에즈 운하 통과를 위해 홍해를 지나던 외국 배들이 주도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당국이 구조활동 지원 의사를 이집트 정부에 타진했지만, 국민들의 반이스라엘 정서를 두려워했던 무바라크 정권은 이스라엘의 도움을 단 칼에 거절했습니다.
권력과 결탁했던 부패한 선주
이런 한심한 정부의 대응에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와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자 놀란 무바라크 정권은 부랴부랴 알 살람 98호의 선주인 이스마일 맘두를 처벌하려 했지만 맘두는 사고 발생 직후 런던으로 도주해 버렸습니다. 이집트 최대 해운회사의 소유주였던 이스마일 맘두에겐 궐석상태에서 7년형이 선고됐지만, 사고의 규모와 파장에 비해 터무니없는 판결이어서 국민들의 분노를 더 자극했습니다. 알고 보니 맘두는 당시 무바라크 정권 집권당인 국민민주당 소속 국희의원으로 무바라크가 직접 의원으로 지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 후 비상 계엄령 속에 집권한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는 의회 의원의 일부를 대통령의 지명에 의해 선출하는 독재적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70년 대 한국의 유신체제를 모방한 모델인 것입니다.)
하지만 서슬퍼런 독재권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이집트 언론은 침몰 참사의 진상규명과 무바라크 정권의 무책임한 대응에 눈감았고, 희생자들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천 여명의 희생자를 낸 참사가 벌어졌지만, 무바라크 대통령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참사 2년 뒤, 관영 언론이 마련한 시민과의 대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농담까지 늘어놓습니다.
참사를 농담으로…드러난 권력의 민낯
카이로를 관통하는 나일강의 통근용 여객선이 안전에 취약한 것 같다는 시민의 건의에 무바라크는 "홍해에서 침몰한 그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농을 던지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방영됐습니다. 최근 만난 이집트의 한 대학교수는 당시 사건이 5년 뒤 벌어진 시민혁명의 직접적 동인은 아니지만, 가슴 한 켠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은 시민들에겐 무바라크의 독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알 살람 98호 참사가 기억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알 살람 98호 참사의 기록을 돌아보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빼닮은 참사가 수 천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에서 재연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8년 전 이집트 홍해 앞바다에서 벌어진 엉망진창인 구조활동과 권력자들의 무책임은 고스란히 진도 앞바다에서, '컨트롤 타워'가 아님을 거듭 강조하는 최고 권력과 잇단 공직자들의 황당한 처신으로 투영돼 있는 듯 합니다. 돈벌이를 위해 안전을 무시한 채 선박을 개조하고 낡은 배를 사들여 침몰 위험에 승객들을 제물로 내모는 기업의 행태 역시 두 사고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고'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참사'가 될 지 '극적인 구조 드라마'가 될 지는 권력이 국민을 대하는 방식과 그 사회를 지탱해 온 '도덕성'에 달려 있다는 점 역시 두 참사는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창현 기자chyun@sbs.co.kr
주변의 이집트인 지인들도 만날 때마다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한 편으로는 놀랍다고 얘기합니다. 이집트보다 30년 가까이 앞서 시민혁명을 이뤄내고 민주주의와 경제에서는 한참 앞서있다고 생각했던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후진적 참사가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러면서 자신들도 8년 전에 비슷한 선박 침몰로 천 명이 넘게 희생된 적이 있는 데,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꼭 당시 이집트의 상황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빼닮은 두 참사…이집트판 세월호 "알 살람 98호"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집트인들이 세월호 참사를 비교하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과 과거 이집트 언론 자료들을 이리저리 뒤적여 봤습니다. 참사의 발단과 정부의 대응까지 세월호 참사와 너무나도 빼닮아 있었습니다.
최악의 침몰사고…최악의 대응
8년 전인 지난 2006년 2월 3일, 천 4백여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탑승한 여객선 알 살람 98호는 사우디를 출발해 이집트로 향하던 도중 홍해상에서 침몰합니다. 388명이 구조됐지만, 대다수가 사우디로 돈 벌러갔던 노동자들이던 이집트인들을 포함해 무려 천여명이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알 살람 98호는 1970년 이탈리아에서 건조한 여객선이었는 데, 21년 뒤인 91년에 당초 설계였던 승객 천명과 차량 2백대가 승객 천 3백명과 차량 320대를 태울 수 있도록 대폭 변경됩니다. 무리한 설계변경으로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복원력이 떨어진 세월호와 비슷한 설계변경이 이뤄진 것이죠.
사고의 원인은 지금까지 알 살람 98호의 엔진 화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몇몇 생존자들이 엔진실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를 목격했고, 이후 재판과정에서는 출항 전 엔진이상이 있었고 선사와 선주에게 보고가 됐지만 이를 묵살하고 출항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승객의 생사보다 중요했던 무바라크 심기 경호
이 사고가 이집트 국민들의 분노를 산 결정적 이유는 무바라크 정권의 무책임한 대응이었습니다. 사고 당시 무바라크 대통령을 포함해 정권 수뇌부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축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던 카이로 경기장에 있었습니다. 한창 경기의 흥이 오른 상태에서 살아 있는 파라오로 불리던 무바라크의 심기를 건드리기 주저했던 관료들은 알 살람호 침몰 사고에 대한 긴급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집트 당국은 결국 천 여명이 수장될 때까지 거의 아무런 구조활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구조활동은 수에즈 운하 통과를 위해 홍해를 지나던 외국 배들이 주도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당국이 구조활동 지원 의사를 이집트 정부에 타진했지만, 국민들의 반이스라엘 정서를 두려워했던 무바라크 정권은 이스라엘의 도움을 단 칼에 거절했습니다.
권력과 결탁했던 부패한 선주
이런 한심한 정부의 대응에 희생자 가족들의 절규와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자 놀란 무바라크 정권은 부랴부랴 알 살람 98호의 선주인 이스마일 맘두를 처벌하려 했지만 맘두는 사고 발생 직후 런던으로 도주해 버렸습니다. 이집트 최대 해운회사의 소유주였던 이스마일 맘두에겐 궐석상태에서 7년형이 선고됐지만, 사고의 규모와 파장에 비해 터무니없는 판결이어서 국민들의 분노를 더 자극했습니다. 알고 보니 맘두는 당시 무바라크 정권 집권당인 국민민주당 소속 국희의원으로 무바라크가 직접 의원으로 지명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 후 비상 계엄령 속에 집권한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는 의회 의원의 일부를 대통령의 지명에 의해 선출하는 독재적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70년 대 한국의 유신체제를 모방한 모델인 것입니다.)
하지만 서슬퍼런 독재권력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이집트 언론은 침몰 참사의 진상규명과 무바라크 정권의 무책임한 대응에 눈감았고, 희생자들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천 여명의 희생자를 낸 참사가 벌어졌지만, 무바라크 대통령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참사 2년 뒤, 관영 언론이 마련한 시민과의 대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농담까지 늘어놓습니다.
참사를 농담으로…드러난 권력의 민낯
카이로를 관통하는 나일강의 통근용 여객선이 안전에 취약한 것 같다는 시민의 건의에 무바라크는 "홍해에서 침몰한 그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농을 던지고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방영됐습니다. 최근 만난 이집트의 한 대학교수는 당시 사건이 5년 뒤 벌어진 시민혁명의 직접적 동인은 아니지만, 가슴 한 켠에 분노를 차곡차곡 쌓은 시민들에겐 무바라크의 독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알 살람 98호 참사가 기억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알 살람 98호 참사의 기록을 돌아보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것처럼 빼닮은 참사가 수 천킬로미터 떨어진 한국에서 재연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8년 전 이집트 홍해 앞바다에서 벌어진 엉망진창인 구조활동과 권력자들의 무책임은 고스란히 진도 앞바다에서, '컨트롤 타워'가 아님을 거듭 강조하는 최고 권력과 잇단 공직자들의 황당한 처신으로 투영돼 있는 듯 합니다. 돈벌이를 위해 안전을 무시한 채 선박을 개조하고 낡은 배를 사들여 침몰 위험에 승객들을 제물로 내모는 기업의 행태 역시 두 사고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고'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참사'가 될 지 '극적인 구조 드라마'가 될 지는 권력이 국민을 대하는 방식과 그 사회를 지탱해 온 '도덕성'에 달려 있다는 점 역시 두 참사는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창현 기자chyun@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