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와 장마가 오락가락하는 칠월 말에 제주를 찾았습니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60년 전 제주 4.3에서 대표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 가운데
한 곳을 찾아갑니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안봉수 씨는 바로 이 마을의 이장입니다.
“너는 안씨 집안의 스물여덟 남매 가운데 스물 다섯째 아들이다.” 안봉수 씨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가끔 들은 얘기입니다.
지난해 가을, 우연하게 4.3에 얽힌 그의 아픈 가족사를 듣게 된 인연으로 다시 찾아가는 길입니다.
제주에서 동남쪽으로 길을 잡아 한라산 줄기를 넘어섭니다.
숲과 초원이 교차하는 광활한 목장지대가 이어지고,
곧이어 멀리 비행기들을 늘어놓은 정석 항공관이 나타납니다.
항공관을 지나서 마을에 이르기까지 곧게 뻗은 길은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억새와 코스모스가 피어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길 너머로는 키 작은 숲과 초원이 교차하는 마을의 공동목장지대가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곳곳에 크고 작은 오름들이 이어집니다.
가시리 마을은 이 오름들로 둘러싸인 광활한 분지가 저 멀리 남쪽 표선 백사장으로 이어지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시리는 땅이 기름져서 예로부터 제주에서도 농사가 잘되는 마을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지금도 가시리 마을의 주업은 농업입니다.
감귤, 무, 당근, 콩 등을 주로 재배합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제주도의 중산간 마을 곳곳에 정책적으로 마을 단위의 공동목장이 만들어져서,
한 때 이곳 사람들의 주요한 수입원이었지만, 축산업이 쇠퇴하면서 300여만 평이 넘는 공동목장은
지금은 놀리는 땅이 되었습니다.
300만 평이나 되는 땅을 전체 마을이 법적으로 공동소유하고 있는 특이한 마을입니다.
가시리는 조천의 북촌리, 제주의 노형리와 함께 4·3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대표적인 마을입니다.
가시리는 4·3 직전 8개 자연부락에, 가구 수 400여 호, 인구 1천 6백여 명에 이르던 큰 마을이었습니다.
4·3을 거치는 동안 이 마을 사람 500여 명이 죽고, 온 마을이 송두리째 불태워졌습니다.
하지만, 조용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이 마을에서 이제 4·3의 피비린내 나는 흔적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4·3의 깊은 아픔은 이제 몇 분 남지 않은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만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끝내 복구되지 못한 채 지금은 밭이 되어버린 새가름이라는 마을 터에 안내 표지판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외지인이 찾기는 어렵습니다.
방화 그리고 학살
1948년 11월 15일 새벽, 중산간 마을들을 소각하여 입산한 ‘공비’의 토벌을 원활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제주도경비사령부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대령) 소속의 표선면 주둔 중대가 가시리 마을로 진입하여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습니다.
새벽부터 총소리가 요란하였고, 마을 초가집마다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놀란 주민들은 황급히 야산이나 냇가의 나무그늘로 피신했습니다.
피신하지 못한 일부 주민은 총살을 당하거나 불에 타죽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오후가 되어 총성은 멎었으나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하늘을 뒤덮었고 피 끓는 울음이
온 마을을 메웠습니다. 이날에만 이 마을에서 30여 명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안씨의 아버지 안봉규(1912년생, 작고) 씨는 당시 마을의 이장이었습니다.
그는 토벌대를 피해서 달아났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벌대들이 빠져나간 후 집에 돌아온 안씨는 온 가족이 몰살당한 처참한 현실에
넋을 놓아야 했습니다.
안씨의 두 부인과 8남매, 안씨의 누이와 조카 3남매 등 14명의 가족이 가까운 숲에 숨어 있다가
하루아침에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마을이 모두 불에 타서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주민들은 산으로 오르지도 못하고
해변으로 내려가지도 못한 채 마을에 머물며 공포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일주일쯤 지난 11월 22일경,
마을에 ‘양민들은 해변마을인 표선리로 소개하라.’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이때 일부 주민은 연고지를 찾아 인근 표선리나 토산리, 세화리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지만,
선뜻 내려가지 못하고 인근 야산에서 생활하다가 토벌군의 수색작전에 발각되어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소개된 주민은 모두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됩니다.
수용생활을 한 지 한 달이 지난 1948년 12월 22일, 토벌군은 주민을 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일일이 호적과 대조를 해서 가족 모두가 소개해온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을 나누어 세웠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는 사람들에겐 ‘도피자 가족’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은 가족 가운데서도 ‘젖먹이 아기 어머니와 15세 미만은 나오라.’라고 해서
따로 분리해놓고 청장년들을 골라냈습니다.
‘도피자 가족’과 청장년들은 포승줄로 엮어서 어딘가로 끌려갔습니다.
‘도피자 가족’의 멍에를 벗지 못한 이들 70여 명은 모두 표선리의 ‘버들못’이라는 곳에서
집단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날의 이야기를 증언해준 분은 열여섯 살이었지만 작은 키를 핑계 삼아 나이를 줄여서 신고한 덕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토벌대는 젊은 부녀자들만을 따로 끌고 가 온갖 치욕스러운 만행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버들못에서 학살당한 시신들은 흙만 살짝 덮은 채 일 년여를 내버려두었다가 가까스로
유골만 수습해왔다고 합니다.
학살현장인 ‘버들못’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연못은 메워져 과수원으로 바뀌어서 감귤나무만 무성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
살아남은 마을 주민들은 ‘폭도’의 누명을 쓴 채 1949년 5월경 다시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의지할 집안의 어른도 없이 나이 어린 고아가 된 사람들은 오랫동안 외지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때 죽었으면 평생동안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당시 열네 살 소년으로 살아남아 올해 칠십 넷 노인이 된 목격자의 넋두리였습니다.
이삼십 대의 젊은이는 모두 죽고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이 대다수이던 주민들은 토벌대의 지시에 따라
먼저 마을에 한편에 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입산한 ‘공비’들과 접촉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을 쌓는 작업은 이곳 가시리만이 아니라 제주도 중산간 마을 전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불타버린 마을의 집 담과 밭 담들을 헐어다가 높이가 3-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성을 쌓고,
주민 모두가 성안에다 얼기설기 움막을 짓고 마을 재건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마을 어디에도 당시 쌓았던 성벽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모두 헐어다가 다시 집 담과 밭 담을 쌓는 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수소문 끝에 조천읍 선흘이라는 곳에서 헐리지 않은 채 보존된 당시의 성벽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성벽을 쌓고 마을로 돌아왔다고 일상이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민 모두가 밤낮으로 순번을 정해 성벽 주변에 번을 서고,
가까스로 학살을 피한 열두어 살 아이들마저 총과 창을 메고 다녀야 했습니다.
또 주민들이 조를 짜서 멀리 한라산 주변을 둘러 토벌대가 세운 주둔소에 나가 보름씩을 교대로 머물면서
부역을 해야 했습니다.
여자들은 밥과 빨래를 해주고, 남자들은 땔나무를 해다가 주고 보초를 서야 했습니다.
주로 서북청년단들로 구성된 토벌대가 이들 주민들에게 가한 만행은 참혹했지만
‘폭도’의 신분인 주민 누구도 여기에 반항할 수는 없었습니다.
온 가족을 잃고 혼자 남은 안흥규 씨는 이 시기에 다시 마을의 이장 일을 맡아서 온갖 궂은일들을 처리합니다. 주민 가운데서는 그나마 마을 밖 표선이나 제주 등의 외지에 안면도 넓고 발걸음이 많았던 그가 마을 일을
맡기에 적당했던 것 같습니다.
온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안씨는 이 무렵에 다시 가정을 꾸리게 됩니다.
‘폭도’로 몰리지 않았던 표선 출신의 처녀를 새 아내로 맞이하고,
같은 시기에 두 명의 부인을 더 맞게 됩니다.
토벌대에 남편을 잃은 두 여인네와 짝을 이룬 것입니다.
당시 제주에서는 이처럼 살아남아서 그나마 장정 구실을 할 수 있는 남정네들이
여러 명의 홀로 된 여인네와 중혼을 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살림살이를 합치지 않더라도 이른바 ‘반혼(半婚)’의 상태를 유지한 채 사실상의 부부관계로 지내는 경우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척박한 밭농사를 일구어야 했던 농촌에서 그나마 마소를 부려 쟁기질이라도 해줄 수 있는 남정네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어린아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음 붙일 의지가지가 필요했습니다.
안씨가 늘 아들 봉수 씨에게 “너는 안씨 집안의 스물여덟 남매 가운데 스물다섯째 아들”이라고 했다니 세 부인으로부터 낳은 자식이 모두 스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참혹한 인간 말살의 범죄 현장에서 그나마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가 살아가야 할 최고의 이유는 자손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극악한 형편에서 태어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4·3사태 이후 태어난 스무 남매 가운데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식은 열둘에 불과했으니까요.
더는 슬픈 가족사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기가 민망스러웠습니다. 본인도 더 얘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폭도’의 누명, 그리고 침묵
마을로 돌아와 토벌작전을 위한 부역에 동원되면서 가까스로 마을을 재건해가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뭍에서는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장정들이 전쟁에 뽑혀나가는 것은 제주도라고 해서, ‘폭도’라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시리에서도 그나마 나이를 속여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자원해 나갔습니다.
배가 고파서, 또 ‘폭도’라고 핍박을 받느니 차라리 전쟁에 나가서 누명을 벗기 위해서 나이 어린 동생들과
노인들만 남겨둔 채 전쟁에 나가 끝내는 부상병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폭도의 가족들이 6·25 전쟁의 전선으로 나가 인민군과 싸웠습니다.
53년 말에 가서야 제주도에서 공식적인 토벌작전이 끝나고, 54년에는 한라산 일대에 대한 입산 금지령이
해제되었습니다.
‘폭도’ 또는 ‘부역자’ 가족이 연좌제에 걸려 공직과 같은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제주도만의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10대 중후반에서 40세까지 한 세대의 거의 모든 젊은이가 죽어버린 가시리에서 연좌제는
차라리 자신들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4.3 당시 나이가 어려서 살아남은 세대는 제대로 공부를 할 만한 형편조차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시리의 경우, 5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세대들이 처음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81년에 공식적으로 연좌제가 폐지된 후에도 군사정권 내내 그 잔재가 남아 있었던지 이들 교육받은 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던 80년대에 들어서서야 가시리 주민들은 연좌제를 현실적인 문제로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87년의 민주화 이전까지는 제주도에서 누구도 ‘4·3’이라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침묵이 강요되었습니다.
4·3은 말을 못하고 이불 속에서만 ‘사태’ ‘사태’라는 말만 할머니한테 들으면서 컸습니다.
과거의 정부들이 4·3의 비극적인 모든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4·3에 대해 발설하고 논의하는 것을 막아서
망각의 늪에 몰아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4·19혁명 이후 잠시 4·3에 대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으나 곧 군사정부의 엄혹한 탄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4·3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대부분 어른이 어쩌다가 쉬쉬하며 목소리를 죽이면서
‘사태'라고 표현하는 말에서 그것이 위험한 어떤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끼는 정도로 4·3을 알아야 했습니다.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참혹한 실상들이 자신들의 부모 입을 통해서 드러나는데도 그 말을 못 미더워하는
자식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2008년의 4·3
87년 민주화 이후에야 비로소 민간 차원에서나마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기록물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9년에야 마침내 ‘4·3특별법’이 제정되어 체계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되면서
피해의 규모가 개략적으로나마 드러나게 되었고, 필자가 국무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장’ 자격으로 명예회복 조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제주도에 가서 국가가 제주도민에게 저지른 추악한 범죄에
대해서 국가를 대표하여 사죄를 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4·3 관련 사업은 아직도 수많은 과제를 남겨두고 있는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아직 희생자에 대한 국가의 배상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 시작하고 있지 못한 형편입니다.
사건의 발발 경위와 전개과정, 인명의 피해 정도 등에 대해 개략적으로 파악한 정도입니다.
이를 기초로 4·3의 역사적, 정치적, 학문적 평가 작업이 좀 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역사 기록이 바로잡아지고,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진정한 명예회복
조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여건 속에서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 많은 당사자의 증언도 나올 수 있습니다.
당장 이번 방문을 위해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후 삶에 대한
기록과 증언, 연구자료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구보수 세력은 다시 4·3의 역사를 되돌려서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두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4·3 60주년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하려던 일정이 직전에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또 유골 발굴 사업, 유적지 보전사업, 생존자의 증언 채록 사업 등 가장 기초적인 사업에 연차적으로
배정되던 예산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리고 4·3특별법 제정 이후 유족들과 제주도민들이 쌓아온 역사의식이
과거 독재정부 시절처럼 쉽게 무너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곧 이은 4월 총선에서 제주도민들은 한나라당에게 전패를 안겼습니다.
호남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지역입니다.
4·3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에서 수구보수 세력과 제주도민 사이에 한판 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올해 8.15 광복절은 건국 60주년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단정 수립을 반대했다가 처참한 희생을 치른 제주 4·3 60주년에…
이해찬(국회의원,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