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어릴 적에 먹던 숭늉 맛입니다.”
그것도 가마솥에 끓인 숭늉이라고 했다. 믹스커피를 마실 때면 대통령 노무현은 이렇게 느낌을 이야기하곤 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이유를 밝혀주었으면 하는 기대가 섞여 있었다. 안타깝게도 궁금증을 해결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남은 커피를 후루룩 마셔야 했다.
‘원두’보다는 단연 ‘믹스’였다. 말하자면 ‘다방커피’ 마니아였다. 식후의 한 잔은 기본이었다. 외부손님이나 참모와 면담 자리에서도 커피가 대세였다. 이래저래 따지면 하루에 예닐곱 잔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마다하는 적은 거의 없었다. 때로는 이렇게 주문을 하기도 했다.
“달콤한 커피 한 잔 주세요.”
믹스커피와 삼계탕, 그리고 라면
먹을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이 서민적이었다. 가리는 음식도 특별히 없었다. 주방이 마련해주는 대로 식사를 했다. 특별한 선호가 없어서 주방은 대체로 편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였을 수도 있다. 주방 운영관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선호가 분명해야 식단을 꾸밀 때 망설이는 시간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5년 임기 내내 주방을 칭찬했다. 앞에 놓인 음식을 남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부작용도 있었다. 가끔 몸이 약간씩 불어났다. 그러면 열심히 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다. 참모들에게는 “맛있게 먹기 위한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역시 삼계탕이었다. 90년대 말 종로구 국회의원이던 시절에 단골을 맺은 효자동의 삼계탕 집에서 배달을 받기도 했다. 주방이 직접 토종닭을 구해 삼계탕을 끓여 내어온 일도 있었다. 마침 외부 손님들과 오찬 자리였다. 특유의 ‘쫄깃함’을 넘어 그의 말대로 “억쑤로 찔긴” 토종닭이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중간에 숟가락을 놓고 포기했다. 끝까지 알뜰하게 문제의 토종닭을 즐긴 사람은 대통령이 유일했다.
외국 순방을 다니는 동안에도 그는 현지 음식에 잘 적응했다. 국빈만찬 식탁에 올라오는 생소한 음식들을 골고루 음미했다. 삶은 말고기처럼 입맛에 약간 맞지 않는 음식도 성의를 다해 몇 점을 집었다.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숙소에 돌아와 라면을 즐길 수 있는 배는 항상 비워놓았다.
유일하게 가리는 음식이 있었다. 밀가루였다.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가려야만 했다. 알레르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원인은 불분명했지만 밀가루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 메뉴가 양식이라 해도 국내 행사인 경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에게는 쌀로 만든 빵이 특별히 제공되었다. 문제는 외국 순방 때의 식사였다. 쌀로 만든 빵을 가져나갈 수도 없었고, 현지에서 특별히 주문을 할 수도 없었다. 부득이 약을 복용한 후 오찬이나 만찬 행사에 임했다. 희한하게도 라면에 대해서만큼은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구경하는 것보다는 체험하는 것?
운동도 열심히 했다.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30분 이상 스트레칭을 했다. 요가를 곁들인 스트레칭이었는데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일과 후에나 주말에는 경내의 체력단련실에서 수시로 운동을 했다. 임기 후반에 가서는 뜸해졌지만 등산도 열심히 했다. 2~3주에 한 번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 오르곤 했다. 장관들이나 참모들이 동반했다. 출입기자들과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함께 올랐다.
북악산에서 접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그는 미안함을 감추지 않았다.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미안함이 결국 임기 후반에 등산로를 개방하는 조치를 낳았다. 1968년 1.21사태 이후 38년만의 일이었다.
가끔은 인근 고궁이나 멀리 수목원에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자주 있는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휴식을 위해 경호원들에게 부담을 주게 되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피했다. 그러다 보니 재임 중 일반 휴양지로 떠난 휴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경호의 추가 부담이 없는 군 휴양지를 선호했다. 일정도 대부분 3박4일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 휴가를 떠나기만 하면 생기는 다양한 사건·사고들이 충분한 재충전을 방해하기도 했다.
영화 관람을 위해 시내 중심가의 극장을 찾기도 했다. ‘밀양’, ‘길’, ‘왕의 남자’ 등은 직접 극장을 찾아가 관람한 영화였다. ‘타짜’처럼 필름을 구해 강당에서 관람한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음향과 화질이 극장 수준은 아니었지만 감상하는 데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다. 축구 등 스포츠의 관람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사실 그다지 내켜하는 편이 아니었다. 2006년 월드컵 당시에는 밤늦게 열린 한국 팀의 경기를 지켜보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골이 들어가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사연을 참모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정치인 시절에는 골프를 꽤 즐기는 편이었지만, 대통령 재임 중에는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골프 자체를 즐겼다기보다는 그 계기에 사람들과 대화를 즐겼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듯싶다. 퇴임 후에는 후원자인 강금원 회장의 충주 골프장에서 참모들과 가끔 골프를 하기도 했다. 봉하마을로 참모들을 부르는 것에 비하면 심적 부담이 훨씬 덜했다. 골프를 핑계로 수도권에 있는 참모들이 내려오고, 그는 봉하마을에서 올라왔다. 중간 지점이라 그와 참모들 모두가 시간을 절약하는 만남이 되었다.
대화, 최상의 취미이자 최고의 일상
독서는 취미라기보다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었다. 남다른 지식욕이 있었다. 장관들이나 청와대 참모들은 그에게 다양한 책을 권했다. 책에 깊이 집중하는 그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받은 책을 한 구석에 던져놓고 방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쪽을 넘기며 내용을 파악하는 대통령이었다. 책은 그렇게 그가 사람들,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그가 가장 중시한 소통방식은 대화였다. 대화는 최상의 취미였고, 최고의 일상이었다. 사람들과 섞여서 대화할 때 그는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를 만나도 그의 이야기는 다르지 않았다. 상대에 따라 이야기를 바꾸는 일이 없었다. 총리를 만나도, 말단 공무원을 만나도, 언론인을 만나도, 봉하마을을 찾은 방문객을 만나도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일관되어 있었다. 속내도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천성이었다.
2008년 말의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 형님이 구속되면서 퇴임 대통령은 사저에서 칩거를 시작했다. 그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대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조금씩 꿈을 접기 시작한 그는 ‘진보의 미래’를 주제로 집필 작업에만 몰두했다.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왔을 무렵, 그를 찾는 지인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세상과의 대화가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그와 가족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된 4월 초의 어느 날, 집필 관련 회의를 마치고 서재를 나서면서 그는 비서들에게 하소연하듯 이야기했다.
“이것도 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 글이 성공하지 못하면 자네들과도 인연을 접을 수밖에 없다. 이 일이 없으면 나를 찾아올 친구가 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