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정권의 끝나지 않은 잔재, 부림사건
1981년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정권은 가장 먼저 민주화 세력을 찍어 눌렀다.
1981년 7월 서울지역 대학생 모임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무더기로 구속했으니,
이른바 ‘학림사건(學林事件)’이다.
같은 해 9월 부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부산의 학림사건, ‘부림사건(釜林事件)’이다.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 최병국 검사의 지휘에 따라 공안 당국은 사회과학 독서 모임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1981년 6월부터 다음해까지 잇따라 영장 없이 체포해
20일~63일간 불법 감금, 고문하고 기소했다.
“관련 피고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엎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의식화 교육을 되풀이하고 학원 시위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경향신문(1982. 10. 27)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에서는 “구속자 대부분 1979년 이흥록 변호사가 만든
부산양서조합 회원들이었다”고 전한다.
“개업식 축하모임, 돌잔치, 송년회를 한 것이 모두 집회로 규정됐고 계엄법,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다.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를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운명이다> 中
무고한 이들은 고문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조작됐다.
1998년 발간된 <부산민주운동사>에 따르면 물고문, 통닭구이, 몽둥이 구타는 예사였고,
생판 남남끼리도 경찰의 각본 속에서 공범으로 둔갑했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때 첫 인권 변호를 맡은 것을 계기로
인권 전문 변호사의 길에 들어섰다. 후일 그는 부림사건을 “삶을 바꿔놓은 사건”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무죄를 외칠수록, 군부정권의 포승줄은 더욱 팽팽해졌다.
사건 관계자들은 결국 재판에서 집행유예 또는 징역 3~7년을 선고 받았다.
따로 재판을 받았던 한 사람은 국가보안법 부분에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유죄로 번복됐다.
그에게 1심 무죄를 선고한 부산지법 서석구 판사는 이 일로 전주로 좌천됐다가 결국 사표를 내고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한편 사건을 지휘한 최병국 검사는 2000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돼 3선 의원을 지냈다.
1983년 12월 부림사건 피해자 대부분은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그러나 부림사건은 법률적으로 여전히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남았다.
2009년 법원의 일부 무죄 판결로 피해자들은 28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지만,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기존 판결은 파기하지 않았다.
올해 3월부터 부산지법은 부림사건에 남은 유죄 부분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고 있다.
부림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