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아이가 자라는 내내 불안하다. 아이가 잘못될까봐 불안하고, 내가 지금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지 궁금하고 불안하다. <출처: gettyimages>
부모는 아이가 자라는 내내 불안하다. 아이가 잘못될까봐 불안하고, 내가 지금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지 궁금하고 불안하다.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게임에서는 하다가 잘못되면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하면 그만이지만 육아는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니 답답할 따름이다. 첫 아이 때의 실수를 둘째에게는 안 하리라 다짐해보지만, 막상 둘째를 키우다 보면 성격도 다르고 상황도 바뀐 것이 많기에 완전히 새로운 불안이 엄습한다. 그럴 때면 아이를 다그치기도 하고 더 좋은 것을 해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아이는 “제발 나를 가만히 놔둬요!”라고 반항하기 일쑤다. 한 번 삐끗하면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데, 아이와 실랑이를 한 번 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고,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어렵다.
열심히 사는 성실한 부모일수록 많은 불안을 경험하는데, 대개 그 불안을 아이에게 뭔가를 더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한다. 뭐라도 하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의도적으로 방임을 하는 부모들도 있다. 불안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서 아이의 현재 상황을 회피하고 보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그냥 아이가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합리화한다. 정말 그럴까? 양쪽 모두 불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루지 못하고 있는 부모다.
부모는 불안이라는 비가 내릴 때 그 불안을 대신 맞아주는 우산이 되어야 한다. <출처: gettyimages>
아이를 키울 때 느끼는 불안의 대부분은 ‘앞날에 대한 걱정’이다. 앞날을 걱정하고 미리 대비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지만 걱정이 지나칠 경우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리고 사람은 불안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한다. 힘들고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불안을 어딘가로 넘긴다. 아이를 키우는 스트레스와 불안을 아이에게 그대로 던지면 부모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편안해진다.
더 좋은 학원에 보내고, 아이가 나태해지지 않도록 닦달하고, 쉴 틈 없이 뺑뺑이를 돌리면서 학원까지 차로 실어 보내고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이면서 학원이 끝나는 한밤중까지 기다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을 부모는 ‘정성을 들인다’, ‘노력한다’라고 여긴다. 뭔가 몰두하고 있을 때에는, 또 남들이 하는 것을 함께 하고 있을 때는 불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는 당장 불필요한 것들을 지나치게 하느라 자칫 그 나이에 정말로 누려야 할 ‘현재’를 즐기거나 경험하지 못한 채 공부하는 기계로만 발달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부모는 불안이라는 비가 내릴 때 그 불안을 대신 맞아주는 우산이 되어야 한다. 학원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들이 말하는 “지금 000을 하지 않으면 애 망쳐요”, “아직도 그걸 해요? 우리 애는 벌써 한참 전에 진도를 다 뽑았는데” 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말을 듣고도 버텨내야 한다. 그들도 사실은 자신의 불안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있을 뿐이다. 그 불안을 아이의 우산이 되어 대신 맞아주면 아이는 그 아래에서 편안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가 자라나서 십대가 된 이후부터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들이 현저히 줄어든다.
아이와 함께 서울역을 지나가던 한 여성이 길거리의 노숙자를 보고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저렇게 되는 거야.” 이렇게 아이에게 불안을 조장하며 겁을 주는 것은 사실 노숙자를 보면서 느낀 부모의 불안을 아이에게 전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눈앞에 존재하지도 않는 먼 미래를 그리면서 아이에게 불안을 전가하는 것, 비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이란 원래 불안하고 불확실하며, 완전할 수 없는 비포장도로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해하고,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이의 잘하는 면을 보기보다 미흡한 면만 부각시키면서 더 노력하라고 비판하게 된다.
부모가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은 꼭 필요하고 아주 중요한 일이다. 현실적인 걱정거리를 나누는 것도 좋은 일이다. 십대 아이와 그런 걱정을 나누면 아이는 자신이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의견을 내며 ‘한 표를 행사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또한 부모와 함께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부모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존경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부모가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은 꼭 필요하고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부모가 아이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출처: gettyimages>
부모는 아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신의 고민을 적당히 털어놓으면서 아이들이 ‘우리 엄마 아빠는 힘들어도 열심히 노력하며 사시는 분들이야’라는 걸 느끼게 해야 한다. 그게 부모가 할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부모가 아이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엄마가 지금 너 학원에 보내느라 등골 휘는 거 알기나 해? 엄마는 옷 한 벌 제대로 못 사 입고 있어.”, “엄마가 죽는 꼴 봐야 네가 정신을 차리지? 어휴, 힘들어 죽겠어. 자식이 뭔지.”
자신도 안고 가지 못할 막연한 두려움을 아이에게 신세 한탄하듯 쏟아 부어서는 안 된다. 부모는 그저 ‘과장해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아이는 부모의 신세 한탄이나 우울함의 표현을 훨씬 심각한 현실로 인식해서 불안해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신이 빨리 커서 부모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에 짓눌려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지 못하거나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있다. 또는 빨리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신이 안전해지는 길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마치 난파선을 탈출하듯이 말이다.
착실하고 성실하며 열심히 살아온 부모들일수록 미래에 대한 불안, 아이 키우기에 대한 불안이 올라오면 뭔가를 더 해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더 큰 자제력으로 억제해야 한다. 해주려는 욕심을 지켜보며 버티는 마음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일시적으로는 부모를 더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해주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면서 아이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 또한 지금 당장 뭔가를 해준다고 해서 크게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되면 이후에 유사한 일이 생겨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있다. 불안을 견디는 부모의 능력이 강해지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마음속으로 ‘대세에 지장 없는 일이라면 버텨보자’는 태도를 가지려는 노력을 통해, 부모는 불안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아이 키우기에 대한 불안이 올라오면 뭔가를 더 해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더 큰 자제력으로 억제해야 한다. <출처: gettyimages>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모습, 본받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물론 아이보다는 훨씬 성숙하고 완성된 인격체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십대가 된 아이들은 결코 부모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완벽해 보이는 부모는 그 자체로 재앙이다. 부모가 실수도 하고 그걸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아이도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해볼 용기를 갖게 된다. 또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 아이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게 커지거나, 부모를 넘어설 용기 자체를 내지 못한 채 평생 부모의 그늘 안에서 살아가면서 인정받는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러니, 아이와 논쟁을 할 때 아이가 부모의 허점을 공격한다고 해서 발끈하거나, 부모의 단점을 언급할 때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는 이제 바깥세상의 다른 어른들과 자기 부모를 비교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부모가 먼저 솔직하게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아이도 자신의 단점을 부정하거나 남 탓, 상황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쿨하게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변화하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단점이나 약점을 들킨다고 해서 아이가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면 어쩌나 불안해하지 말라. 아이는 그런 불안을 애써 감춘 채 강한 척, 센 척하는 부모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삶의 불안과 불완전함을 안고 어떻게든 힘든 세상을 헤쳐가려 노력하는 ‘어른 사람’으로의 부모를 보고 싶어 한다. 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아이도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이로 인한 불안은 훨씬 줄어든다.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가 진짜 아이를 위한 부모라고 하지 않던가. <출처: gettyimages>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불안의 연속이다. 하지만 부모가 그 불안을 아이에게 고스란히 떠넘기지 않고 우산이 되어준다면, 부모 자신도 한층 성숙한 인격체가 될 것이고 아이도 불필요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고 현재를 즐기면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아이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사는 부모는 불쌍하다. 자기 인생을 즐기는 방법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이로 인한 불안은 훨씬 줄어든다.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가 진짜 아이를 위한 부모라고 하지 않던가. 부모는 불안이라는 비를 대신 맞아주는 우산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