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어떤 분이 '박노자'가 한겨레 21에 쓴 글의 링크를 달았는데 지금 시기에 읽어야 하는 글인 거 같아 다시 글 전체를 올립니다.
저는 가끔가다가 제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언제부터 “코리아”와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졌는가에 대해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적으로 반한” 그 시점은 1991년가을, 고려대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그 당시 서울의 “데모 문화”를 접할 때이었습니다. 물론 페레스트로이카 중의 소련이라고 해서 데모가 없었던 것도 전혀 아니고 저만 해도 고교 시절이나 대학 입학 직후에 데모에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본 데모와의 큰 차이 두 가지가 있어서, 제게 서울에서의 데모야말로 어떤 궁극적인 “숭고정신의 발휘”로 느껴졌습니다. 첫째,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당 중앙의 노선을 지지하는 이상, 소련에서의 데모는 사망이나 부상을 각오해서 감행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진압봉과 방패들이 날라가고 돌멩이들이 던져지고 화염병에 터지는 그 아비규환은, 정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회의할 정도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소련에서는 자본주의를 보다 급격하게 도입하자고 데모를 했던 “자유민주파” (즉, 자본파) 인사들이 어디까지나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서 현재보다 더 부유해지려고 데모한 데에 반해서 제가 서울에서 알게 된 “데모 학생”들은 졸업도 하지 않고 위장취업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위험과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을 보면 이거야말로 숭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왠지 “코리아”가 존경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학을 해온 것은, 아마도 그 초발심 덕분인 듯합니다. 과연 저뿐만인가요? 제가 아는 일본인, 미국인 중에서도 1980년대의 한국을 방문해 그 저항 에너지에 감복돼 한국학도가 된 사람은 몇 명 있습니다. K팝에 이끌려 전세계 한국학과들의 문을 두드리는 요즘 세대를 보면 격세지감 비슷한 걸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저항… 한국 근현대사를 특징지은 이 단어의 의미는 지난 60여년 동안 참 괄목할 만한 변천을 겪어왔습니다. 한국 전쟁의 전야에 “저항”은 지식인에게도 얼마든지 – 후대의 체게바라처럼 – 총을 메고 전투를 치르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유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천재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박치우 (1909-1949)는 프랑츠 파농이나 체게바라보다 먼저 아니었을까요? 박치우와 같은 지식인들의 저항의 방식은 치열했던 만큼 그들이 원하는 목표도 아주 굴직했습니다. 덜도 더도 말고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원한 것이었죠. 유격전을 바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이 정도의 치열함도 이 정도의 목표도 약 1970년대말까지 일각에서나마 잔존해왔습니다. 남민전의 전사들도 궁극에 가서 무장 봉기를 계획했으며 사회주의 원칙에 기반된 통일을 원했습니다. 그들 중에서는 사형당하신 분 (신향식)도 옥사하신 분 (이재문)도 옥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요절하신 분 (김남주 시인)도 계셨습니다.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 것은, 한국이 세계주변부에서 준핵심부로 진입한 1980년대부터이었습니다. 사노맹 등 사회주의 지향 그룹들도 일부 남았지만, 민주화운동의 상당부분은 대체로 고문실과 땡전뉴스가 없는 “정상적” 자본주의 국가를 원했던 셈입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 경향을 대표했던 유시민 등은 2000년대 신자유주의 정권의 실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에 저항의 흐름은 크게 봐서 세 가지 줄기로 나누어졌습니다. 온건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나 전향한 일부 사회주의 지도자 (이재오, 김문수 등)들이 주류 정계에 합류해버림으로서 “저항”을 마감했고, 전향을 거부한 일부 사회주의자 (노회찬, 심상정 등)들이 사민주의적 입장으로 전회해 의회주의적 노선으로 갔고, 급진적 좌파민족주의자 (한총련 등)들이 정권이 파낸 함정 (1996년의 “연세대 사태” 등)에 빠져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이 시기의 가장 대규모의 대중저항인 1996-1997년 총파업 등까지도 대체로 “법 개악”을 막으려는 수세적 차원이었으며 무장투쟁이나 체제변혁을 입에 올릴 수도 없게 됐습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 경향은 심화됐습니다. 가장 큰 대중적 투쟁들은 줄줄이 패배를 맞은 “저지형” 투쟁들이었고 (한미FTA저지투쟁, 대추리미군기지 신축 저지투쟁, 광우병 의심 쇠고기 수업저지투쟁 등등) 노동운동의 가장 급진적 부대가 된 비정규직들은 인제 노동법 개악 반대도 아니고 그저 부당노동행위 반대, 정규직 전환 차원에서 싸운 것이었습니다. “회사 가족으로 만들어달라”는 싸움은 가장 흔한 비정규직노동운동이 된 셈이죠. 노동자대투쟁이 수반한 1987년민주화투쟁과 달리 2008년 촛불항쟁은 노동운동과의 관계만들기에 실패해 패배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단계에서는 투쟁의 의제는 인제 “체제”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사기꾼형의 한 통치자의 사대주의적 추태들과 식량품 안전문제이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지난 번의 사기꾼형 정권과 달리 이번 정권은 광신도형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저지르는 폭거들은, 2008년과 비교 안될 정도입니다. 예컨대 전교조를 법외노조화시킨 것은, 역사 시계추를 전교조를 합법화시킨 김대중 정권 이전으로 돌려버립니다. 통진당에 대한 해산심판 청구는 이것보다 더합니다. 민노당-통진당의 “원조”에 해당되는 것은 1990-1992년의 민중당입니다. 그 당시의 권위주의적 노태우정권마저도 민중당을 감히 해산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정권이 통진당을 마치 “북괴의 도구”처럼 묘사하려 하지만, 통진당의 일부 좌파민족주의자들이 주체사상 등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도 통진당의 성격은 크게 봐서는 민중당이나 그 전 시절의 혁신정당들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민주사회당 등등)과는 대동소이합니다. “평화통일, 복지사회 건설”, 즉 복지주의와 좌파민족주의 결합 위주의 전형적인 한국적 사민주의 단체죠. 박근혜의 아버지마저도 혁신정당들을 완전히 강제해산시키지 못했는데, 그 딸은 인제 아버지가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완수하력 하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이 폭거들에 대한 저항의 수준은 아직까지 2008년 촛불항쟁에도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1996-1997년의 총파업이나 1987년의 민주화 항쟁/파업 대투쟁과의 비교는 아예 무의미할 정도고요. 도대체 “저항 역사의 곡선”은 왜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밑으로 쳐집니까? 정권은 오히려 악랄해지는데, 우리가 왜 이렇게 일찌감치 얌전해진 것일까요?
흔히들 대학들을 취업학원으로 만들어버린 생계불안을 저항을 잠재운 요인으로 끕는데, 이는 진실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생계불안으로 치면 4.19혁명을 일으킨 학생들은 훨씬 더 불안했습니다. 조금 더 크게 보면 후기 자본주의 특유의 소비주의 풍토와 신자유주의는 시민적 에토스 (보편적인 윤리 규준)를 크게 바꾼 것은 더 큰 설명의 틀이 되겠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몸값을 높여 자신을 좋은 조건에 노동시장에 팔아야 하는 “나 홀로 작은 자본가”가 돼 상호간의 경쟁에 매몰된 원자화된 개개인들에게는 “연대, 투쟁”은 그저 “귀찮은 일”로만 보입니다. 세상이 너무 한심해보이면 인터넷에다가 비판적 댓글 한 두개 달면 달지 그 이상의 투쟁은 이미 “성공을 위한 경쟁”에 바쳐야 할 “나”의 자원의 낭비입니다. “댓글”들이야말로 국정원의 대국민 심리전 도구가 된 것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원자화된 사회의 거의 유일한 상호 소통의 도구는 인제 댓글들이기 때문이죠. 제가 1991년에 본 고려대생들은 노태우의 정권이 비도덕적이라고 비분강개했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도덕”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합니다. 지나치게 도덕적이면 오히려 무한경쟁에서는 약점이니까요. 또 다른 측면이지만, 1991년의 학생들은 한반도 남반부를 점령하다싶이 하여 또 곳곳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미군에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한국 여자를 추행하는 미군”은 비분강개의 대상이었죠. 그런 미군들이 없어진 것도 아니지만, 이런 류의 비분강개가 거의 사라진 배경에는 인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러시아 등지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한국인 섹스관광객 등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요? “미국의 신식민지”는 인제 수많은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아류 제국주의적 주체가 됐는데, 이에 대해서는 “순량한 국민”들은 대리만족을 느끼는 듯합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저항이 하강곡선을 탄 것은 한국자본주의의 형태와 국제적 위상 등의 변화에 기반된 일입니다. 한데 지금 박근혜정권의 폭력에 우리가 1991년과 같은 방식으로 맞서지 못할 경우에는, 결국 한국은 싱가포르처럼 “선진형 권위주의 국가”로 전락될 확률은 없지 않아 있습니다. 1991년과 같은 데모들이 쟁취한 자유들, 예컨대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나 (국가보안법으로 제한된) 표현의 자유 등도, 저항이 있을 때만 유효합니다. 저항의 하강곡선이 땅에 닿는 순간, 이 자유들도 얼마든지 증발될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으로서는 분노와 저항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저의 직감입니다. 저항의 파도가 다시 한번 오지 않으면, 나중에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