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저 태양을 두려워 하지 않았네…"
생전에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녹음한 신곡과 미발표 21곡
생전에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녹음한 감동과 추억 눈물이 함께하는 21곡의 미발표 곡이 공개된다.
그대 빈들에, 외로운 밤이면, 수, 나루터에 비 내리면, 등 처음 공개되는 신곡과 사랑했어요, 어둠 그 별빛, 빗속의 연가, 바람인줄 알았는데 등. 통기타 하나로 노래하여 문 열고 닫는 소리, 주변의 잡음, 김현식의 살아 있는 숨소리 등 다시 부활하여 바로 앞에서 노래하는 벅찬 감동을 준다.
타이틀곡 "그대 빈들에" 는 김현식의 죽음을 예감하는 가사와 절규 혼이 담긴 목소리가 울컥하게 만든다.
1990년 11월1일 서른두 살의 나이에 간경화로 요절한 김현식의 목소리가 23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김현식이 작사· 작곡 한 미발표곡 9곡을 담은 앨범 ‘2013년 10월 김현식’(사진)이 출시됐다. ‘그대 빈들에’, ‘외로운 밤이면’, ‘나루터에 비 내리면’, ‘수’, ‘이 바람 속에서’, ‘나는 바람 구름’…. 앨범은 1996년 출시한 미발표 트랙 모음인 7집 곡들, 정규 앨범을 통해 발표한 노래들까지 모두 21곡을 수록했다. 이 곡들은 모두 그가 1988∼1990년 병상에서 통기타로 연주하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 한 라이브 곡들이다. ‘사랑의 불씨’, ‘다시 처음이라오’ 등 기존 발표곡 12곡도 다른 느낌과 형식으로 부른 새로운 버전이어서 미발표곡이나 다름없다. 1980년대 김현식의 앨범을 제작한 동아기획(현 동아 엔터테인먼트 ) 김영(64) 대표가 23년간 소중하게 간직해 온 테이프 속 음악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곧 김현식의 기일이어서 그를 추억하는 팬들에게 반가운 선물이다.
“이해가 안 되겠지만 전 현식이와 지금도 대화를 나눕니다. 지난해 현식이가 ‘내년에 앨범을 내면 안 돼?’라고 제게 물었죠. 죽은 사람과 대화한다는 게 안 믿어지겠지만….” 김대표는 또 다른 이유로 “음악에 다양한 장르가 공존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며 “요즘 음반을 안 사는데 현식이로 인해 다시 한번 음반을 사는 흐름도 이어지길 바랐다”고 털어놓는다.
유족과 협의를 하고 낸 미발표 곡들은 1988∼1990년 김현식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백제병원과 이촌동 금강병원 병실, 그리고 자택에서 녹음한 곡들이다. 세상을 떠나기 2주 전에 녹음한 곡도 있다. 스튜디오에서 계획하고 한 녹음이 아니어서 보컬 과 사운드가 고르지 않다. 그래서 김 대표가 1년에 걸쳐 그의 육성에 반주를 덧입히고 믹싱, 마스터링 과정을 거쳐 완성했다. 사운드는 투박해도 울림은 크다. 메마른 땅처럼 갈라지지만 스러져가는 몸 구석에서 뽑아낸 김현식의 소리는 마치 곁에서 노래하듯 되레 생생하다.
김 대표는 “현식이가 화장하지 않고 민낯으로 노래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병상에서 통기타 하나로 자기가 노래하고 싶을 때 마음에서 우러나 부른 곡들이어서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스케줄 잡아 녹음한 것보다 진정성이 짙다. 사운드가 부족해도 영혼의 울림과 메시지는 훨씬 강하다”고 설명했다.
타이틀곡 ‘그대 빈들에’는 2집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 3집의 ‘비오는 어느 저녁’, 4집의 ‘한밤중에’, 신촌블루스의 2집 ‘바람인가’와 ‘빗속에서’, 5집의 ‘넋두리’로 이어진 김현식 표 블루스의 맥을 잇는다. “이젠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나 봐, 이젠 잊어야 할 시간이 되었나 봐∼.”(‘그대 빈들에’) 스산한 발라드곡 ‘나루터에 비 내리면’은 반주가 도드라질 정도로 음질이 나쁘다. 그러나 “나루터에 비 내리면∼” 하고 내지르는 귀에 익은 그의 창법 덕에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나는 저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았네
- 김현식의 미발표 유작에 부쳐
강헌 (음악평론가)
모든 예술가의 때이른 죽음이 신화가 되지는 않는다. 그 죽음이 예술적 정점의 9부 능선쯤에서 일어났을 때 요절의 신화는 가장 찬란한 빛을 뿜으며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이 단숨에 완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재하의 죽음은 너무 일렀고 김정호의 죽음은 정점에서 조금 지나간 시점에서 일어났다. <0시의 이별>과 함께 스물 일곱 살의 나이에 타계한 배호의 요절이 첫 번째 신화의 탄생이라면 그로부터 19년 뒤인 1990년 11월 서른 셋의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고한 김현식은 유작 <내 사랑 내 곁에>의 전설적인 성공을 동반하며 한반도의 남녘을 뒤흔든 이 신화의 극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음악가들의 죽음은 공교롭게도 모두 11월에 일어났다.
김현식의 신화는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봉기라는 개념과 동의어다. 그의 성공과 함께 한국 대중음악사는 언더그라운드라는 황홀한 비경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의 죽음은 이 영광의 연대기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의 대중음악은 천민적인 음반산업 자본과 매스 미디어의 입맛에 따라 운명이 좌지우지 되는 사실상의 노예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다. 뮤지션의 예술적 자율성은 70년대의 김민기와 한 대수의 경우처럼 권력과 시장에 의해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이었으며 조용필 같은 80년대 슈퍼 스타마저 최근까지의 저작권 논란이 말하듯이 자신의 음악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70년대 청년문화의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인 이장희의 프로듀스로 데뷔한 김현식은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대장으로 불리게 되는 김영이 수장으로 있는 동아기획과 조우하면서 한국 대중악가가 자본과 미디어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예술적 판단으로 표현하는 자유예술가의 시대로 접어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계의 지형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는 동아기획의 쌍두마차 들국화와 더불어 (물론 이들 열혈 음악청년 뒤엔 조동진이라는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정신적인 맏형이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었다) 콘서트와 음반 그 자체만으로도 대중과 만나고 시장의 성공을 일구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오만하게 증명했다. 방송사의 PD들은 당황했고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던 젊은 수용자들은 환호했다.
김현식이 분만한 일련의 상황은 1980년대 한국대중음악이 엄청난 외연의 확장을 가져왔다는 점, 그리고 ‘동아기획’이라는 이름의 음반산업의 기획능력이 주류 네트워크가 지배해 왔던 기존의 생산/소비의 패턴을 우아하게 조롱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 ‘언더그라운드’의 돌풍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저 서구의 60년대 세대들이 일구었던 도전적인 문화 담론에까지 다다르지는 않는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이념적 동요를 맞이한 60년대의 서구 젊은이들은 사회적 통제의 조직과정과 기존 가치의 개념, 그리고 전통에 대한 지속적인 반란을 꿈꿀 수 있는 자신들만의 문화공동체를 꾸리기 시작한다. 사회적 항의를 위한 청년인텔리들의 토론집회, 블랙 파워, 히피들의 공동생활촌 등이 이들의 문화적 거점이었으며 이 속의 젊은이들은 진정한 두려움으로 여겼던 계시적인 시한폭탄이 터지기 전에 그리고 30세가 되기 전에 그들의 부모와 교회, 그리고 정부가 요구했던 삶의 양식에 반하는 모든 경험을 가져보기로 작정했다.
이들은 약물이 제공해 주는 강렬한 감정적 고양을 통해 새로운 현실 인식을 가로막는 문을 부숴뜨리려고 노력했고, 흐르는 시간을 멈추어 놓고 순간의 경계 위에 전적으로 존재하고 싶어 했으며 이성의 감옥 속에서 감각의 세계로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또한 젊은 흑인들은 백인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인종적인 대안을 제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피부색의 차별성을 막론하고 이들의 주안점은 자발성에 기초해 있었으며 원리원칙으로의 복귀와 개성에 대한 성찰, 경쟁보다는 화합의 정신이 혼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신군부로 요약되는 80년대의 억압적인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한국의 대중문화가 이와 같은 총체적인 저항의 자유를 허용할 리 만무했다. 이들은 여전히 공연윤리심의위원회를 통한 사전 검열로 표현의 자유를 구금하고 있었고 향정신성 의약품에 관한 법률로 예술가들의 몸부림을 적극적으로 단속한다. 김현식 또한 앞의 유구한 선배들이 밟아갔던 것처럼 첫 번째 성공을 거둔 직후 대마초 사범으로 구속된다. 곧 풀려나긴 했지만 그는 밴드의 멤버들을 잃었고 무엇보다도 이 사건을 계기로 마약 대신 알코올에 탐닉하면서 치명적인 건강의 손상을 부르게 된다.
김현식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십대 후반 이후 좌충우돌의 파란만장한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그는 서른 세 해의 짧은 일생 동안 아들 완재를 얻고 이촌동에 작은 피자 가게를 운영했던, 여유 있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던 짧은 결혼 초기의 시간을 제외하면 평온한 순간을 가지지 못했다. 격렬한 에너지로 점철된 그의 젊은 날의 삶은 자유분방하고 거친 그의 음색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그것은 단지 블루스, 발라드에서 로큰롤에 이르는 광활한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본령은 단연 블루스일 것이다.
세상이 모두 다 내 것 같을때
나는 저 태양을 두려워하지 않았네
세상이 모두 어둠으로 덮힐 때
나는 또 어둠을 걸었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나봐
이젠 잊어야할 시간이 되었나봐 (<그대 빈들에> 중)
그가 떠난 지 이십삼 년이 속절없이 흘렀고 그가 남긴 여섯 장의 정규 앨범의 목소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낡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웅혼하고 신선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목소리들이 문득 옛 기억을 일깨우며 우리 앞에 배달되었다. 그가 병석에서 기타를 치며 부른 <그대 빈들에>는 그의 출세작인 2집의 <바람인 줄 알았는데>로부터 3집의 <비오는 어느 지녁>, 4집의 <한밤중에> 그리고 신촌블루스의 2집 <바람인가/빗속에서>, 5집의 <넋두리>로 장구하게 이어지는 김현식 표 블루스의 최종 완결판이다. 그의 목소리는 초의 마지막 불꽃처럼 세상과 이별하기 직전의 뜨거운 회한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노래는 마치 천국에서 보내온 김현식의 편지를 뒤늦게 발견하고 읽는 기쁨과 슬픔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타계 23주년을 맞아 그와 영광을 함께 했던 동아기획의 수장 김영이 그의 마지막 육성에 반주 파트를 덧붙여 발표한 이번 유작 모음집은 모두 아홉 개의 미발표 트랙을 담고 있으며 1996년에 7집으로 발표했던 미발표 트랙 모음에 실린 <사랑의 불씨>와 <다시 처음이라오>, <이 바람 속에서> 그리고 호세 펠리치아노의 노래를 커버한 <Rain>을 다시 다듬어서 추가했다. 나머지 여덟 곡은 정규 앨범을 통해 발표했던 노래들을 병상에서 부른 넘버들이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투명하다시피 스산한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 발라드 <나루터에 비 내리면>은 이 앨범의 또 하나의 백미다. 김현식의 노래를 들으며 성장했던 그 때의 젊은이들은 이제 힘겨운 중년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승을 떠난 그나 아직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들이나 그 운명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이 노래를 통해 이십삼 년 전의 김현식은 그다운 어투로 얘기한다.
또 하나의 미발표작 <외로운 밤이면>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슬로우 템포의 록 넘버 <어둠 그 별빛>이나 <비처럼 음악처럼>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한 노래다. 가을비까지 내려준다면 금상첨화!
이 앨범을 주욱 따라가다 보면 이 음반이 그저 그런 미발표 유작전이 아님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노래 하나 하나엔 절멸의 마지막 벼랑에 선, 죽음 앞에 작아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짊어진 젊은 가객의 혼이 마지막으로 비상한 빛을 줄기차게 뿜어내는 것이다.
이 앨범엔 1980년 데뷔했던 시기의 풋풋한 청년의 내음과 그를 불후의 존재로 만드는 데 마지막 방점을 찍은 <내 사랑 내 곁에>가 담긴 1991년의 여섯 번째 정규 앨범이자 유작의 향기까지 아니 데뷔 이전의 음악 소년 시절의 치기 어린 표정까지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특히 이 앨범의 막바지에 수록된 <내 사랑 어디에>룰 보라. 통기타의 여음 속에 솟아 오르는 젊음을 향한 약동의 짧은 후렴구는 그가 아직 70년대 통기타 포크 음악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데뷔 시절의 에너지가 시간을 거슬러 극적으로 재현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이 데뷔 앨범에 담겼던, 저 1980년의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를 앞세운 조용필 열풍 아래 사장되었던 비운의 명곡 <떠나가 버렸네>로 마감하는 것은 절묘한 트랙 편집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자기 맘대로 살다간 사람이다. 그는 오만하리만치 자신의 청중 이외의 어느 누구를 위해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저 1960년대의 마침표를 찍은 우드스탁의 풍성한 자유로움을 죽기 직전까지 동경했으며, 아마도 지금 천국에서 그들과 지음을 나누고 있을 지도 모른다. 뭔가 맘에 들지 않으면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고 마약으로 감옥 신세를 지기도 하면서 그리고 급기야는 술로써 그 자신을 서서히 무너뜨려 갔다.
이러한 자기 학대 속에서 세상의 규범으로부터의 소외의 목소리가 배태되었다. 그가 생각했던 소외는 계급적인 소외가 아니라 사랑의 소외였다. 그는 끊임없이 규격화와 질서화를 요구하는 세상의 요구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노래를 통해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의 대부분의 노래는 사랑에 관한 것들이지만 거의 예외없이 그것들은 사랑의 기쁨이나 아름다움, 행복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랑의 좌절 이후의 고독과 상처의 쓰라짐으로 일관되어 있다. 갈라지고 탁한, 절규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따라서 이와 같은 세상에 대한 그의 반감의 몸짓으로 느껴진다.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 한국 언더그라운드 신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면 김현식은 이 신화의 완성자이다. 그리고 빨리 찾아온 그의 죽음은 바로 그 폭풍을 마감하는 구두점이 되었다. 김현식의 가장 큰 공적은 보컬리스트로서 전통적인 트로트의 감수성에 기대지 않고 서구 대중음악의 대표적인 장르 대부분을 정면 돌파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한국 대중음악의 문법 속으로 완벽하게 녹여버린 데 있다. 그는 70년대의 유산인 포크음악로부터 록과 록에 기반한 발라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블루스와 재즈 퓨전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의 소화력을 과시했다. 바로 이 소화력이 그로 하여금 유재하로부터 그의 밴드 동료였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이나 빛과 소금에 이르는 위대한 후배 뮤지션들이 그를 구심으로 집결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엄인호와 이정선, 한영애 같은 선배 동료들과 함께한 한국 블루스 음악의 자궁 신촌블루스 의 활동 또한 김현식의 위대한 족적이다. 김현식은 조동진 사단과 더불어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영광시대를 연 동아기획군단이라고 하는 거대한 계보도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공헌자였으며 약 11년에 걸친 그의 활동 기간은 바로 한국 언더그라운드의 역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떠나고 없지만 그의 노래는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시대는 변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