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 어른이나 꿈이 무엇이냐는 소리는 많이 들으며 살아가나 보다. 내가 초등학교 때에는 고아원 원장이 되는 게 꿈이었고 중학 시절에는 3류 소설가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필 왜 3류 소설가이냐고 아무도 묻진 않았지만 타고난 재능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이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3류로 꿈을 낮추어 잡았던가 싶기도 하다. 암튼, 그땐 그랬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의 꿈은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 다들 의아해 하지만 더는 묻지 않는다. 그건 꿈 측에도 못 낀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17살 한 소년의 꿈은 대통령이었다. 또 그 나이의 한 소년의 꿈은 안마사였다.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우리 선생님들은 어떤 반응을 할까. 당연히 안마사를 하겠다는 아이에게 꿈은 말야, 자고로 창대하게 꾸어야 하는 거야. 라든가 아니면 그 아이의 꿈을 갖게 된 이유를 물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꿈인 소년은 선생님으로부터 따귀를 맞았단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선생님은 자신이 장난치는 줄 알았을 지도 모른다고 말하는데 그는 시각 장애인이다. 시각장애인이라면 안마사가 꿈이어야 하고 대통령은 따귀를 맞아야 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서글프고 아픈 또 하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우리는 왜 꿈을 물을까? 물론 묻는 이들에 따라 원하는 답에 시선을 달리할 필요는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교육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이로서 생각해 보면 대개는 꿈이 있어야 성공하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좋게 말해 ‘목표 설정’이 되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게 된다는 숨은 의도가 있기도 한 것이다. ‘꿈은 이루어 진다.’는 그 말이 얼마나 하기 쉬운 말인지는 많은 이들이 현실적으로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내 아이들이 멋지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꿈은, 늘 꿈을 꾸는 주인공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각인되거나 의도적인 방향 제시로 그 선택을 달리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놈의 ‘꿈’이라는 것이 시도 때도 없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꿈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로 규정짓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길고 다양하고 달콤하다. 한 가지의 맛에 길들여질 수 없음이다. 아이들에게 질문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무엇이 하고 싶으니?’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면 아이들은 즐겁고 신나고 생기발랄하게 성장한다. 이것 저것 두리번거리고, 실수도 하고 스스로 탐구해 보는 작은 열정들도 만날 수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들을 알아 차릴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기도 한다. 그런 자유로운 시간들을 마구마구 줄 때 아이들은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로 진행되고 있는 이 사회는 협력과 상생의 가치를 원천 봉쇄하는 곳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절감하고 어느새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극단적인 양극화로 인해, 부의 편중과 그로인해 발생되는 권력의 힘을 만나는 사회·문화의 환경에서, 우리들의 행복은 글자로만 존재하는 듯하다. 극단적인 경쟁주의를 일상에서 경험하며 살아온 우리 사회의 모습은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퍼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좋은 직업’이 따로 있다. 공무원, 의사, 변호사, 판·검사, 등등. 과연 직업에 귀천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교과서적인 대답의 ‘없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소리치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벽돌공과 의사의 실수입이 비슷하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지만 만약 그렇다면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그렇게 넘칠 수 있는 것일까. 짐꾼 아들이 물려받지 않아서 회사를 팔아버린 사장 아버지, 아이의 진로에 간섭하지 않는 부모들, 더 좋은 학교를 굳이 보내려고 애쓰지 않는 부모들이 지구촌에 있다. 교육을 많이 받아서 박사나 의사가 되면 약간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벽돌을 잘 쌓는 기술자를 이들 못지 않게 존경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들의 사회는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하지만 세금 제도로 돈을 많이 벌면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바로 덴마크의 이야기이다.
더 잘사는 동네, 못사는 동네의 차이도 없단다. 그러나 못사는 동네 사람들이 잘사는 동네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 만족하며 산다는 그 나라를 마냥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어떤 한 분야만을 변화시켜서 이루어질 환경은 아니었다. 각 분야마다 얼키고 설켜 있는 우리 사회는 마치 거미줄 같다. 직업이 아닌 직장을 선택하는 사회의 청소년들에게 우리는 진로 코칭이란 것을 한다. 마치 이 코칭을 받으면 자신의 진로가 저절로 정해질 수 있다는 듯이 스스로를 그곳에 가둔다. 허나 개인적으로 진로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을 다시 주입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는 ‘참고’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과정들을 지나면서 평생직장을 찾는다. 즉, 일하는 사회적 환경을 우선으로 해서 결국에는 연봉과 안전성을 선호하게 만들어 간다. 결국에는 적당한 직함이 필요한 직장을 선택하여 사회적 신분을 부여받기를 간절하게 원하는 모습들로 고시나 공무원 시험 준비로 청춘을 불사른다. 현재를 희생하여 미래를 보장받는다는 것에 암묵적 동의를 하고 만다. 물론 소수는 사회적으로 학습된 현실에 저항하며 자신의 직업을 스스로 찾아내는 수고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수고로 얻게 되는 직업은 연봉도, 그럴싸한 사회적 직함도 딱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어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낯설지만 스스로의 만족감이 높은 일을 하며 경제 가치를 만들어 낸다.
바로 여기, 이 지점에서 직업윤리가 발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직업인으로서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삶의 가치, 자신만의 신념들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생활 수단을 확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자아’를 실현하고, 그런 개인들이 ‘사회발전’에 참여하며 살아갈 때 ‘행복’을 만나는 것이다. 나의 노동이 누군가를 살아나게 하고, 그의 노동이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공동체이기에 우리는 서로 의존하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잘 산다’라는 의미를 사회구조의 잘못된 현실 속에서 시키는 대로 자신의 역할만을 잘 해내는 정의롭지 못한 선택과 사회 정의를 상쇄시킬 수는 없다.
의미있는 삶이란 물질을 수반한 사회 환경 조건의 충족만으로 채워질 수는 없다. 윤리적 가치가 포함되지 않는데 자신이 놓여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한다는 것은 자가 기만에 가깝다.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혼돈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데 수월해지게 길들여 왔다. 우리 사회에 버젓하게 군림하는 부(富)의 모습과 안락함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존엄성이 실종된 사회인이 된다는 의미로 아이들에게 되물림 되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못다 이룬 ‘좋은 엄마’라는 내 꿈이 여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평생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얼마나 설레이고 콩닥거리며 매일을 살아질 것인지는 상상만 하여도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