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전에 여기저기서 냉소적인 평들이 들려서, 사실 큰 기대 안하고 갔습니다. 만화책 받았으니, 보긴 봐야지...그래도 제가 약속은 잘 지키거든요.^^
근데 영화 내내 완죤 몰입하여 보았고, 끝에 가선 감탄사까지 내면서 봤습니다. 마지막에 나온 곰에게 손을 흔들뻔....^^;;
계급투쟁을 직설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편한 분도 있었던 것 같고, 그걸 다루는 방식이 도식적이라는 평도 있던데, 딴 건 몰라도 제가 계급투쟁은 좀 알거든요.^^ 그런 평가...는 전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계급투쟁이나 정치학, 혹은 철학적 관심을 가진 저 같은 사람에겐 아주 진지하고 흥미로운 텍스트였어요. 영화를 보면서 반복해서 떠올린 사람은 랑시에르와 벤야민. 이 영화에서 계급투쟁이나 정치를 다루는 방식은 이 두 사람의 생각에 가장 근접해 있었습니다.(통상적 도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계급투쟁이라고 한다면, 혁명이 곡절 끝에 어떻든 '끝/목적지'(기차의 제일 앞 칸)에 도달했을 때, 기차 속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다는 것이 무언지를 알게되었을 때, 진정 혁명을 꿈꾼 자라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출현한다는 것을 보여줄 때, 이 영화는 통상적인 계급투쟁의 이론을 넘어섭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자들의 수, 그것이 인류라고 할 때, 주어진 자리에 주어진 몫을 할당하고 관리하는 것으로서의 치안/통치라는 랑시에르의 개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이 기차 안에서의 질서인데, 혁명 내지 정치란 그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 수로 세어지지 않는 자들의 수를 세게하는 것이란 점에서 정치의 개념 역시 랑시에르적입니다.
그것은 일단 혁명적 정치가 균형과 통제를 위한 통치로 전화된는 사태인데, 랑시에르는 정치와 통치(치안)을 구별한 바 있지만, 정치가 통치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난점에 대해선 별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치/통치의 개념은 랑시에르적이지만, 랑시에르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끝칸에 탄자들의 희망의 끝에서 절망을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감독이 허무의 심연을 보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에 허무의 심연이란 그렇게 희망을 끝까지 따라갔을 때, 그 끝에서 출현한 절망과 대면하고 그것을 직시할 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블록버스터가 어떻게 이런 귀착점에 이를 수 있었던가 놀라웠습니다.
희망의 끝에서 '혼자 있음', 그 혼자있음의 고통... 진정한 절망이란, 허무의 심연이란 여럿이 빠져들어도 결국은 그런 혼자있는 곳을 덮쳐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차, 역사나 시간의 상징으로 흔하게 사용되는 은유지요. 역사의 기관차. 벗어날 수 없는 궤도를 따라 도는 기차 안에서, 저항과 투쟁은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 영화는 그럼으로써 도달한 목적지가 목적지가 아님을 말하려 합니다. 진정한 혁명이란 오히려 역사의 기관차를 세우는 것이라는 벤야민의 테제를 이 영화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기이한 일입니다.
이 영화는 또 '두 개의 문'을 다른 방식으로 다룹니다. 혁명이란 어쩌면 한 칸에서 다른 칸을 옮겨가는 문의 통과 내지 해체가 아니라, 바깥을 향해 난 다른 종류의 문을 여는 것이라고, 들뢰즈라면 '탈주'라는 말로 불렀을 다른 종류의 전략이라고 할 겁니다. 외부, 기차의 정지.... 이는 하나하나의 문을 통과하는데 몰두해 진정 바깥을 보지 못하는 기존의 맑스주의적 정치(혁며주의든, 개량주의나 사민주의든)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만은 아닙니다. 선한 인물들의 반전이 한번은 눈물나고 또 한번은 당혹스러운데, 전자가 현실을 초과하는 극적 성격을 갖는다면, 후자는 기차 안에서 최종적 딜레마를 아는 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충분히 설득적이었습니다. 공연한 반전강박도, 배트맨 식의 억지춘향스런 선악의 해체도 아니어서 보기 좋았습니다.
이런 놀라운 면모에 비하면, 비현실적인 디테일(커브트는 열차에서 총질하는 거, 문을 미련스런 방법으로 따거나 깨는 거 등등)은 아주 사소한 결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사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디테일은 이에 비하면 정말 참을 수 없는 비현실성을 갖지 않나요?)
아, 말이 너무 길어져서,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스포일러를 줄이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네요. 저는 시간나면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아주 훌륭한 열차여행이었습니다.
[출처] 이진경님의 설국열차 짧은 평 짱짱..|작성자 사슴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