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위대한 사나이의 이야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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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년. 평안북도 의주의 장씨집안의 장남으로 장준하 선생이 태어납니다.
집안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일본군에 쫓겨 이사를 하기도 하면서 선생은 어린시절을 보내지요.
1944 년 1월에 가족들을 위협에서 구하기 위해서 선생은 일본군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고
부대에 배속받아 배치되자 마자 바로 탈영을 감행, 1,000 km 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독립군 기지로 찾아갑니다.
장준하 선생은 그곳에서 중국 군사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장교훈련을 받았고, 1945 년 2월에 광복군 장교가 됩니다.
그리고 일본에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을 작전을 계획하던 미국 OSS 에 의해 훈련을 받게 됩니다.
미국 OSS 는 현재 CIA 의 전신으로 장준하 선생은 이 곳에서 침투, 특수폭파, 요인암살 등 세계 최고수준의
특수전 요원으로 훈련받았고 8월 14일 조선 잠입을 위해 출동하던 중 일본의 항복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국내로 정식 입국하죠.
김구 선생은 장준하 선생을 자신의 뒤를 이을만한 인재로 여겨 윤봉길 의사의 태극기 등
독립운동의 귀중한 유산들을 장준하 선생에게 넘겨줍니다.
이후 장준하 선생은 1953 년 사상계 라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한 잡지를 발간하여 여론을 주도합니다.
사상계를 통해 이상만의 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장준하 선생은 4.19 혁명 이후
장면 정부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6개월도 되지않아 박정희가 군사구데타를 일으킵니다.
최초에 박정희가 내걸은 혼란수습 후 즉시 정권이양을 믿었던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를 잠시 지지하였으나
곧 검은 속내를 파악하고 독재자 박정희에게 저항을 시작합니다.
장준하 선생은 독립군 장교출신에 세계 최고의 특수전 교육까지 수료한 초 엘리트 군인, 그리고 사상계를 발간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당시 군대부터 일반 민중까지 재야 대통령으로 불릴만큼 가장 폭넓고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박정희 따위가 자신의 라이벌이라는 사실에 치욕을 느낄 정도로 바르고 곧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박정희 또한 잘 알고 있었고 어느 한부분에서도 그를 넘을 수 없는 박정희는 장준하 선생을
항상 미워하고 굉장히 신경썼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서빙고동에 위치한 지하취조실에 끌려간 장준하 선생에게 기관원이 폭력을 쓰려고 하자
장준하 선생이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내며
" 나는 독립군 장교출신의 군인이다. 일제 앞잡이의 수하따위가 감히 내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
라고 소리지르며 오히려 기관원을 두들겨 패려했다고 합니다.
크게 당황한 기관원이 상부에 보고하자 보고를 들은 장군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 틀린 말씀은 아니다. 보내드려라 "
라고 지시하여 기관원들에게 오히려 경례를 받으며 당당히 걸어나갔다는 일화에서 드러납니다.
1967 년 박정희는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장준하 선생을 감옥에 보냈으나
장준하 선생은 주변의 권유로 옥중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어 버립니다.
선생은 국방위원회에서 활동했는데 군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군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
청렴하고도 올바른 의정활동에 군대내에 수많은 장성들이 감화되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 장준하 선생이 방문한 여러 부대의 사령관 중 한명이 특히 선생에게 감화되어
장준하 선생을 깍듯이 모시고 이후에도 자주 연락하며 따랐다고 합니다.
장준하 선생은 유신이 선포되자 격렬하게 저항했고, 유신반대 백만인 서명을 주도하는 등
박정희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을 계속 입혔고, 박정희는 사실상 장준하 한사람을
구속하기 위해서 긴급조치 1호, 2호를 발동하는 등 장준하 선생을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 긴급조치 이야기는 2000 년대 진상규명 위원회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직접 증언했음.)
꺽이지 않는 반대운동에도 유신체제는 더 강해져만 갔고 탄압도 심해져만 간다고 느낀 장준하 선생은
모종의 결심을 합니다. D-day 는 광복 30 주년인 1975년 8월 15일.
재계, 언론, 정치, 군대, 학생 등 모든 각계의 계층의 주요인물이 장준하 선생과 연락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박정희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보부 내부에서도 장준하 선생의 계획을 지지하며 동참하는
인물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장준하 선생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으나, 시행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윤봉길 의사의 태극기 등 독립운동의 유산들을 모두 박물관에 기증하고, 부모님의 산소를 성묘,
그 외 재산 및 신변 정리를 한 것으로 보아 어떤 사람은 대규모 구데타나 혁명을, 어떤사람은
세계 최고의 요인암살 기술을 익혔던 장준하 선생인 만큼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암살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 거사 직전 장준하 선생은 연금중이던 김대중을 찾아가 뒷일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거사일 직전 내부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정황이 발견되어 거사일이 5일 미루어졌고,
거사를 이틀앞둔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등산 중에 의문의 살해를 당합니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유신체제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후 국회의원 시절부터 장준하 선생을 따르던 군사령관이 찾아와 유족에게 전세금을
건네는 등 지속적으로 신경을 써주었고, 가족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지켜줍니다.
p.s
그리고 4년 뒤.
1979 년 10 월 26 일.
장준하 선생을 그리도 따르고 존경했으며, 유족들을 챙겨주었던 군사령관은 궁정동에서 권총을 꺼내들어
야수의 심정으로 독재의 심장을 쏘게됩니다.
그 군사령관의 이름은 김재규. 당시에는 군을 전역하고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박정희 독재체제의 2인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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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이 정확히 박정희와 반대편에 있었고, 문무 모든면에서 박정희를 압도했으며
그때문에 박정희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준하만큼은 미워하고 진심으로 두려워했으며
살아만 있었다면 김대중보다 먼저 대통령이 되었을 인물이라고 평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