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0세의 봄을 지나온 친정엄마는 현재 암환자세요.
5년전에, 말기3개월시한부의 삶을 선고받았지만, 다행히도 목숨만은 지금도 살아있어요.
평생을 술과 노름(노름의 법칙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술이 상당히 취한 상태에서 뒷주머니에 삼백여만원씩의 돈을 자주 털리고 오고했음. 그 사실도 같이 자리에 앉아 거저 먹기로 나눠가진 사람들중 일행하나가 다음날 아침에 와서 일러주고 가곤 함),등등 가정경제를 책임지지 않은채 64세를 일기로 스스로 가셨어요.
스스로 가셔야 한것도 이미 자신의 온몸에 손쓸틈없이 퍼져버린 암때문이었고, 매일매일 귀신이 눈에 보인다고 공포스러워했었어요.
그당시의, 20대의 저는 아주 우울하고 암울한 세월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한마리 눈먼 물고기같은 처지였어요.
스무살때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이십대의 끝자락이 보이는 그시절까지 제겐 돈이 있지않았어요.
아빠가 혼자 세명이나 되는 우리 자매들의 통장을 관리해준다고 해놓고 이미 그걸 혼자 다 썼거든요.
그런줄도 모르고, 나중에 자취방을 얻어야 하니 돈달라고했을때 길길이 날뛰던 아빠를 이해할수 없었다가 결국 그게 마이너스통장으로 돌려진걸 알고 얼마나 막막했던지.
우리들의 돈은 다 내돈이라고 오히려 당당해했던 아빠는, 결국은 저와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 돈없이 간 제주도여행길에서조차 삼백만원만 마련해달라는 전화를 사위에게 했습니다.
그러기전에 들어온 축의금들은 다 아빠편으로 들어갔는데도 여기저기 널려진 빚잔치때문에 마침 눈먼사위가 굴러들어왔으니 전화를 한겁니다.
아주 오랫동안, 저는 아빠 살아생전에도 아빠라는 호칭을 부르지 않았어요.
그건 국민학교6학년때부터였어요.
준비물도 마련해주지 않았고 장대비오는 아침에도 아무 가책없이 빗속으로 우리를 내몰고 자신은 슬슬 우산쓰고 나가서 술마셔야 하니까 절대 우산을 준적이 없는 비정한 부정을 가졌어요.
그리고 더운 복중에도 신발을 사주지않아서 결국 더운 여름에도 속에까지 털이 누벼진 털신을 신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겨울이 왔던거죠.
늘 고아원에 갖다줘버린다고, 그곳은 소금국이 나온다는 부연설명을 자랑스럽게 하는 아빠의 모든것이 다 더러웠어요.
술마시고 길거리를 헤매듯이 오고 네발로 기어오고, 발로 문을 차서 들어와선 엄마의 머리채부터 나꿔채선 온동네순례를 하겠다고 마당까지 질질 끌어와 담장한귀퉁이에 찧어댑니다.
학교에서도 그런 아빠의 행적이 다 소문나버리고, 소근대는 사람들의 눈초리속에서 제가 서있을곳은 아무데도 없던 외로운 나의 학교생활.
지금도 저는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공포증이 있고, 한편으로는 그 뿌리를 알수없는 깊은 열등감이 있어요.
그 깊은 열등감은 바로 우리 부모님에게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알았어요.
그런 아빠는 공포그자체였어요.
아예 남자들이 다 싫었고,
결혼해라는 말도 공포스러웠어요.
어느날 엄마에게도
"엄마, 경찰이 어느날 우리집 문턱을 넘으면서 아빠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러 오면 좋겠어."
라고 말을 할정도로 아빠란 존재는 공포그자체였어요.
그런데도 아빠는 우리 네자매가 다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 가정을 꾸린 어느날까지도 살아있었고,뇌졸중,암, 동맥경화, 좌골신경통등등의 병으로 오랜세월을 고생하면서도 절대 저세상으로 가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늘 귀신이 보인다, 귀신들이 소복을 입은게 아니라 평상복을 입었다.등등..
우리눈엔 당연히 귀신이 보이지 않았고 그런 아빠가 오히려 가슴속에 얹혀진 아픔이었어요.
빚쟁이들은 매일매일을 왔으니, 귀신보다 더 힘든 현실이었던거죠.
어릴때 우산한번 쥐어주지않고 30원짜리 도화지한장 챙겨주지않았던 아빠가 직장생활을 하던 스무살무렵의 우리들에겐 한번도 돈이 모일 기회를 주지않은채 혼자 다 흥청망청 쓰고 술과 노름으로 세월가는줄을 모르고 살았던 거죠.
그런데도 정작 아빠가 뇌졸중으로 암으로 쓰러졌을땐 집에 돈도 남아있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들의 돈으로 빚을 갚고 병원비를 충당하다가, 빈손으로 시집을 가고나니, 그 냉대와 수모는 가슴에 또 사무치더군요.
그런데 제게는 12살 위인 언니가 있습니다.
그 언니는 현재 51세인데, 아직도 식탁이 세개인 분식집을 월세 33만원씩 내면서 꾸려가고 있습니다.
요즘 장사가 안되 더 힘든데 젊은시절 술먹는 아빠가 싫어 맘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그 댓가로 시부모공양에 가정경제능력없이 매일매일을 노는 형부와, 한겨울 강파른 서릿발같은 마음씀씀이를 가진 서른다된 자식들의 아침도시락을 싸주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가난함이, 관절이 다 비뚤어지게 일하고서도 일곱이나 되는 시동생들의 빚더미와 시아버지의 빚과 형부의 빚에 자신은 정작 빵한조각 사먹지 못하며 삽니다.
언니가 12살때 어떤 스님이 찾아오셨다가 이런말씀을 해주셨답니다.
19살을 조심하라고, 그때 만나는 남자를 조심하라고, 그렇지않으면 엄마와 똑같은 인생을 살것이라고.
무슨일이 있어도 공부는 다 마쳐야 한다. 지금의 네 부모는 네 공부를 마쳐줄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그리고 중학교를 가야 할 나이에 언니는 서울의 개포동에 있는 약국에 1년간 삸을 치루고 점원으로 있게되죠.
일년치의 돈을 받은 아빠는 시골로 내려가 장사밑천을 마련하나, 결국 1년도 못가 집엔 빨간 딱지가 붙여지게 되고
이미 그일은 수시로 있던 일이었다고 엄마는 그러네요.
그리고 엄마가 그리웠던 언니는 1년의 계약기간이 끝나자 시골로 내려왔지만 다시 소처럼 방직회사에 들어가 무려 6년을 일하고 그 돈은 정작 한푼도 만져보지못한채 아빠의 손에서 다 거덜이 나죠.
그리고 19살이 되는 봄에 친구네집에 놀러갔다가 그집 오빠의 눈에 들어 결국은 결혼까지 한거에요.
그사람이 무서웠답니다. 매일 면회보러오고, 피하면 몇날며칠을 기다리고. 집은 다 풍비박산나서 없어져버리고.
결국 그사람이 맘에 안드는데도 결혼을 이듬해에 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거에요.
그러면서 가끔 그 스님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정말 언니는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닐때 공부를 잘했대요. 늘 반장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1등만 했었대요.
엄마는 그런 언니와 저를 자주 비교하면서 서로 바꿔 태어났어야 했는데.. 라는 말을 자주했었어요.
그래요..
어떻게 보면 그런말이 서운할수도 있겠지만, 그다지 그말이 폐부를 찌를정도로 아프진 않더라구요.
다만 엄마의 인생을 가장많이 닮은 큰언니가 같은 여자로써, 안타깝고..
특히 20여년동안 세개의 식탁을 가지고 살아온 언니네 분식집에 앉아있으면 덕지덕지 세월의 때가 묻은 메뉴판너머로 언니의 고단한 슬픔이 느껴져서 맘이 아픕니다. 그리고 19살을 조심하지않으면 엄마와같은 인생을 산다는 그 스님의 말도 저절로 되새겨지고요. 또한 그런 업보를 남기고 가게끔 한 아빠도 다시 무서워집니다.
어쩌면 평생을 그렇게 술과 노름으로 살수있었는지..
그 인생이 무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