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의 역사를 보니까 중세시대가 왜 암흑시대인지 알거 같아요.
카톨릭은 종교의 이름으로 죄없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고..
사람들의 불결하고 더러운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가장 미개한 시대가 중세시대죠.
중세유럽의 역사를 보니까 중세시대가 왜 암흑시대인지 알거 같아요.
카톨릭은 종교의 이름으로 죄없는 여자들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고..
사람들의 불결하고 더러운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가장 미개한 시대가 중세시대죠.
잘은 모르지만
그때 우리나라는 이미 매우 점잖았죠? 조선초기인가요? 유교의 영향일까요?
힌두와 불교철학의 영향아래 절제와 자기수행으로 영적 종교생활에 전념한 인도와 티벳의 승려들처럼
중세시대 유럽의 수도사들은 스콜라 철학의 영향아래 청빈과 금욕으로 영적 종교생활에 전념하기도 하고
유명론과 실재론등 철학적인 논쟁도 활발하게 벌였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일원화된 행정체계는 전 유럽에 미쳤으니 카톨릭은 행정적으로 거대 조직이었죠.
종교자체와는 상관없이 종교의 외형적인 조직이 거대해지고 외부의 견제가 없으면 종교인들은 타락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불결하고 피폐한 유럽인들의 생활상이나 광신적인 마녀사냥이 중세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인문주의가 꽃피던 근대시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시점을 14세기 르네상스를 기준으로 잡기도 하고 15세기 동로마제국 멸망을 기준으로 잡기도 하는데
좌우지간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통상적인 시대적 구분에 의하면 그런 부정적인 현상들은 중세가 아니라 근대시대에 있었던 현상들입니다.
마녀사냥이 민중들의 자발적인 고발에 의해서 이루어진게 많았던걸 보면 히틀러시대의 독일국민들처럼
당시 마녀사냥은 심리적인 전염병처럼 번져나간 유럽의 히스테리적 사회현상에 가까웠죠.
그리고 영화 향수나 레미제라블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기가 비위생적인 생활의 절정이었어요.
비위생적인 생활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된는 과정에서 생겨난 근대화의 산물이었던거죠.
중세시대도 비위생적인 생활을 했겠지만 근대 산업화시기의 비위생적인 생활에는 비할바가 못됩니다.
중세를 무조건 전부 암흑시대라고 하는건 과장된 부분이 많아요.
중세초기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왜소한면이 많았지만 중세후기에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화려해지고...
이슬람의 선진적인 문화도 받아들이고,,,
민주주의적 성격을 띄는 시민자치 도시인 코뮌이 중세시대에 생겨나는등...
근,현대문명의 많은것들이 의외로 중세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위에 중세시대님.
마치 재밌는 역사책 읽듯 덧글 읽었습니다.
중세시대.. 다음기회에 또 재밌는 역사 얘기 부탁드려요~^^
중세초기에는 카톨릭 신부들이 수도원에 틀어박혀서 고대문헌 필사작업과 영적수행, 신학과 철학논쟁을 벌이면서도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자기 생계는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았나요?
애초에 무소유와 청빈사상을 지향하던 탁발수도회?(제가 무종교인이라 잘은 모르겠네요)가
나중에는 탁발이 너무 심해지고 자신의 생계를 민중들에게 의탁하는걸 넘어서 군림하게 되고 권력화 되면서 변질되었던걸로 들었습니다.
중세를 인류상 가장 추악하고 미개한 시대라고
간단히 회 쳐버리는 것이 상당히 미개합니다 그려22222
중세를 미개하다고만은 하지 않지요.
십자군전쟁이나 마녀사냥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암흑기 아닐까요?
십자군전쟁이 종교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요인들도 있었고.
마녀사냥도 그렇지만 십자군 전쟁이 가능했다는건 암흑기와는 관계가 없는거 같습니다.
20세기에도 큰 전쟁이 두번이나 일어났는데요..뭘..
중세를 암흑기라고 낙인이 찍힌건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고대 그리스,로마문화를 파괴시킨것도 있고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 학자들이 중세시대를 과장해서 비하시킨 면도 있습니다.
근대시대에 새롭게 등장한것들도 그 시초는 중세시대에서 비롯되어 거기에서 다양하게 파생되어 발전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것처럼 보이기는 하겠지만 중세시대와 근대시대는 딱 끊어지는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이 되요.
댓글에 감사합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해요
지식이 뚝뚝 떨어져 저희에게 까지 흐르니까요
왜 관계가 없다 하시나요?
중세를 왜 암흑기라 하나요?
오로지 한 종교에 의해 하나의 가치 인정되어서
그외 다른 시싱이나 철학, 종교는 이단시 되었고 그결과
십자군전쟁이나 마녀사냥이 일어난 건데요.
세계1,2차 데전이 종교 때매 일어난건가요? 성격이 다르죠. 비교불가예요.
글고 그 암흑기가 끝난 건 아이러니 하게도
여러번의 십자군전쟁으로 이슬람문화나 동양문회가 유입되면서
과학이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줬죠,
우째 젤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신것 같네요.
중세시대와 근대시대는 딱 끊어지는게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이 되요.
님 말씀처럼 연결되는 이유가 이거랍니다.
저는 십자군전쟁을 윗님과 반대로 해석이 되어지는데요.
진짜 암흑시대라면 십자군전쟁을 못일으켰죠.
물론 전쟁은 나쁜거지만 전쟁의 동기가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허다하게 일어난게 전쟁이거든요.
타문화권으로 원정을 갈정도라면 폐쇄적이지 않았다는 거죠.
이슬람문화권도 오로지 한 종교에 의해 하나의 가치만 인정되었구요.
반면에 중국은 당나라 시기등을 빼면 대체적으로 너무 오랬동안 폐쇄적이었어요.
그런데 중국은 불교, 도교, 유교등 다양한 종교는 가진 사회였던거 같네요.
전 조선인들도 쇼킹한거 같아요..
물론 신라 고려 때도...
그 중에서도 최고는,
중국인들.
전족.....
아오~~~ ㅠㅜㅠㅜ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산 문명권이 있었는지
그 문명권이 얼마나 컸는지 어디에 존재했는지도
좀 알려주시면 의견에 힘이더 있었을 것을~
그 당시의 몰이성이나 비위생이 심하긴 했죠.
덕분에 르네상스 시대가 오자 짧은 기간에 큰 개선이
이루어진 겁니다.
근대이전시대는 지금기준으로는 납득할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죠. 전세계적으로~~
인도는 인신공양 풍습이 수천년동안 이어져오다가 영국식민지시절에 이르러서야 겨우 근절되었다고 하다군요.
중세초기 유럽인들은 고대 그리스/로마문화와의 연결고리는 자유7과라는 학문들과 기독교 그리고 교부철학 밖에 없었어요.
교부철학에는 플라톤 철학이 가미되었으니 그리스철학과도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수도 있죠.
그러던게 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으로부터 역수입 되었고..
저는 중세시대에 발생한 문화는 대학제도와 음악정도만 생각나네요.
그리고 길드를 중심으로한 상업도시들..
원글님이 읽으신 중세유럽사책 제목좀 알려주세요.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네요.~~
책 제목 알려주세요^^
요즘 인문학 뭘 읽을까 고민하고 있던 참인데... 방금 역사쪽으로 방향 정했어요.
다른 인문학 책들도 추천해주시면 고맙게 읽겠습니다^^
현시대에도 미개하고 불견한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요.
인도에 사두 인가? 씻지도 않고 다 벗고 수행한다고 천막치고 길바닥에서 살고요.
일년에 한번 목욕한다고 똥물에다 담구요.
미개하고 불결한게 어디 중세 유럽에만 있을까요.
참 한마디로 싸잡는게 더 황당합니다.
중세초기 서유럽에서도 카롤링거 르네상스라는 시대가 있었죠.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너무 남용해서 탈이지만 나름 학문과 문화가 번영했다고 할수 있어요.
동시대의 중국이나 인도 이슬람문화권에 비하면 초라하지만요....
실제로 그 내면을 파헤쳐보면 종교때문이 아닙니다.
좀더 다양한 중세관련 책들이나 16세기,17세기, 대혁명 전 역사서들을 읽어보시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세와 종교전쟁의 다른 이면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종교전쟁은 권력 다툼이 결국은 핵심이죠.
그 당시 가톨릭을 종교적 입장으로만 이해하면 그 당시 사건들이 마치 광신으로만 보여 이해가 안 가지만
각국 정세를 보면 다 왕권과 권력을 단지 종교를 내세워서 명분을 만들었을 뿐이죠.
특히 유럽왕가쪽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워온 역사가 엄청 길어요. 거기에 종교가 포장을 하고 있고요.
긴 전쟁들 대부분이 저런 왕가끼리의 영향력 행사때문에 생겨난 거고요.
정말 종교가 중요해서 그랬다면 가톨릭 국가 수장이 전쟁이나 영토 확장을 위해서
신교를 믿는 나라를 뒤에서 지원해주는 일따윈 없었겠죠.
당장 프랑스 추기경인 리슐리외만 해도 추기경이면서 동시에 섭정 역할을 한 거나 같은 위치였죠.
이 사람 역시 귀족출신입니다. 30년 전쟁에 관여하면서 프랑스 왕권 강화와 다른 유럽국가간에 세력 균형을 위해서(프랑스를 위협하는 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개신교 편에 서서 같은 가톨릭 세력인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하기도 했었죠.
또한 그 당시 신교세력들 출발선이 가톨릭과 결탁돼 있는 왕권을 비판하고 위협하는 세력으로 느껴졌기때문에 표면상은 신교 탄압이었지만 그 내면엔 결국 왕권에 대한 도전을 하고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목적이 더 강했습니다.
그 당시 주교나 교황들 출신을 보면 귀족 출신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귀족이 주교나 추기경, 왕족이 교황이 되는 일도 허다한 풍토였고요. 그래서 교황들 중에 혼외 자식이 있는 경우도 많았죠. 그 자식한테 추기경 자리를 주는 일도 있었고요.
메디치가 후손으로 나중에 프랑스 왕비가 돼서 성 바로톨로뮤 대학살을 일으켜 신교 타압을 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작은 할버지였던가 그 사람이 교황 클레멘스 7세였죠.
성 바로톨로뮤 대학살만 봐도 이게 종교 탄압은 표면에 불과하고 결국 프랑스 왕권을 위협한 신교 세력에 대한 탄압입니다. 카트린은 비록 프랑스인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절대 왕정주의자예요. 애초에 카트린은 신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가 프랑스내 위그노 신교 세력들이 왕권에 반발하고 나서자 저런 상황이 된 거죠.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독실한 신자가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 드디어 가톨릭에 몸담았다 뭐 그런 게 아닙니다. 역대 교황들 중에 귀족과 왕족들이 많은 것만 봐도 그들만의 이너써클이었던 셈이죠.
십자군 전쟁만 봐도 속내는 뭐...
물론 도미니크 수도회처럼 청빈한 삶을 중요시한 가톨릭 수도회들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나중엔 극단적으로 흘러 이단이나 종교재판에 극단적인 모양새를 보여 역사적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 당시 가톨릭은 위로 향할수록 기존 왕가들과 딸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엮여있죠. 다만 중세에는 종교에 대한불신과 더불어 종교재판이란 허울아래 경쟁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던 시기였기때문에 단순히 중세가 종교로만 이렇다고 딱 잘라 말 못합니다. 민중들에겐 종교를 내세워 이단이네 어쩌네 했지만 지배자들 속내는 결국 자기들 밥그릇이 더 중요한 거죠. 또한 민중들 사이에서도 마녀란 이유로 자신이 평소에 시기했던 이웃을 제거하는 용도로 쓰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어요. 급기야 자기가 먼저 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무고를 해야 하는 분위기로까지 치달았고요. 어느 분 말대로 일종에 히스테리화된 경황도 있었죠.
그리고 위에 다른 분이 적으셨지만 불결하고 더러운 걸로 치면 중세보다 오히려 이후 세대들이
더 위생관념이 안 좋았어요. 심지어 절대 왕정시기였던 루이14세-16세, 대혁명 시기보면 귀족들마저
위생관념이 없다시피했죠. 겉으론 절대 왕권강화와 자랑질을 위해서 경쟁적으로 각국 나라의 왕들이 궁전을 지어대고 부를 과시하며 온갖 치장을 했으나 귀족 부인네들조차도 머리를 자주 안 감아서
긴 막대로 머리 장식속에 집어넣어서 머리를 긁고 ,몸엔 이가 득시글 거렸으며, 그래서 향수 제조기술이
더더욱 발전됐죠.
도시가 발전하고 수도로 인구가 몰리는 반면 하수시설이 안 좋아서 길에는 오물과 온갖 대소변과 쓰레기로 발 디딜틈이 없었고요. 루이 14세는 이를 너무 안 닦아서 입에선 항상 악취가 나서 그 정부들이 고역이었다는 글도 있고요.
와~~ 윗댓글님 정말 박학다식하시네요.
잘 읽고 잠시나마 지적 세례를 받은듯 해요. 감사합니다.^^
태어나기 전이라 .....전깃불이 안 들어와서 ....길거리가 깜깜했을테니....암흑시대라는 건가욧? ㅋ
그래도 그 전 시대 보다는 문명이 발달한 시대였겠죠~^^;;
상수도 시설이 열악해서 비위생적이고 지저분하게 살았던 것과는 별개고요 ㅎㅎ
중세시대를 암흑기라 한 것은.....
로마 교회의 권력이 각국의 왕권을 넘어서면서 세상의 권력과 정보를 모두 소유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이론이 다르면 배척하고 핍박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적인 탐구 방식인 철학적 사고가 기독교 권력으로 철저히 탄압 받았기에
단순한 정체를 넘어서 퇴보하기 이르렀고,,, 고대 희랍시대로 되돌려 졌다고도 했었죠
기독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들은 철학에서 이루어졌었기에,,,기독교적 관점의 철학적 연구만이
허용 되었고요....
합리성을 중시하는 철학의 입장에서 기독교는 매우 비합리적이었으며, 어찌보면 야만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세엔,,, 유럽사회에서 뛰어난 지적인 능력을 가진 모든 인재들은 기독교 교리의 체계화와 세력 확장에 투입되었을 뿐이고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모든 유형의 탐구는 금지됩니다
오직 세계에 대한 직접적 탐구를 하지 않는 논리학만이 허용되었을 뿐이었고요...
한권만 읽은것보다 한권도 읽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판타지 SF 유대 사막잡귀신 종교를 그럴싸 하게 포장 하느라 애쓴다.
그렇게 따지면 다 이상합니다.
불경의 제석천과 아수라신이 싸우는거 보면 판타지SF 활극 수준.
유교 경전인 주역은 고대중국인들의 원시적인 우주관이 반영된 미신적인 점술책
도교의 신비한 방중술도 판타지 수준.
그리고 모든 종교가 다 그렇지만 내세관을 믿는 것부터가 비합리적이에요.
자게에 중세이야기가 나오다니! 혹시 내공있으신분들 중세철학 책 한권만 추천 해 주셔요~~~
예전에 중세철학 한 권 샀다가 종교색만 짙고 내용도 별로였거든요.. T.T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중세편 정도는 작가내공은 기대했었는데 T.T
오오 그렇군요
유럽에서 그 당시 위생관념의 지금과는 다를수 밖에 없던 이유가 패스트 때문 아닌가요 ?
유럽 절반의 인구감소를 가져온 전염병들이 물을 통해 옮겨진다고 믿었기에
씻어서 냄새가 없다는것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였고
귀족들일수록 안씻어서 나는 역한 냄새와 그것을 중화 승화 ? 시키기 위한 향수의 조합이 건강함의 상징이었다고 해요
근대까지 위생이 엉망이었다고 볼수 있는데 그건 조상으로부터 내려받은 안씻기가 후대와서 인습으로 남게 된 경우라고 보면 될것 같아요
오늘날의 위생습관이 생긴건 웃기게도 2천년 초반인가 그쯤 미국에서 처음 생긴 대형호텔에 현대식 샤워시설이 준비되면서부터라고 ... 미쿡에 좋은게 생기니 유럽여기저기서 따라 만들면서 깻끗한 유럽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
아우구스티누스 처럼 중세초기 교부신학자들은 성경에 주석을 달고 해석하는 작업에 있어서 그렇게 경직되지 않았는데
카톨릭의 교조적 경직성은 정치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나중에는 점점 심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제일 심했을때가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때가 아니었을까요?
구교와 신교가 서로 피튀기고 싸울때요.
중세유럽사 잘 배웠어요.
댓글님들 감사히 잘읽었읍니다.
잘 읽고 갑니다
댓글과 더불어 잘읽었어요^^
중세의 가톨릭이 권력도 최고,부패도 최고조였지만 신자가 되고 나서 보니 신학적 관점에선 많은 수도자들이 영성신학을 두텁게 하고 지금의 유럽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한 그런 것이었더군요,
우리가 유교를 몰라도 나도 모르게 베어 있는 유교적 성향이 남아 있듯이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종교는 없으면 안 되는 키워드라는 생각도 들어요.무신론자들이 많은 지금이라 하더라도..
예수회를 설립한 이냐시오의 영성수련을 다녀왔었는데 중세에 그가 정립한 수련법을 (명상이지만 체계적이죠)여전히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고 있고,개신교 신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이 수련을 하러 오는 비율도 상당수더군요.
간혹 역사책 속에서나 보던 토머스 모어의 글을 우연히 읽거나 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두텁게 떠받치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많은 수도자들의 노력으로 여전히 건재하게 종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요즘은 살짝 냉담 중이지만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에서 언급되었 듯이
종교가 해 주는 역할이 있었죠.그 시대에 그것마저 없었더라면 민중들은 아마 더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아이러니하다고 느끼지만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중세가 이룩한 견고한 디딤돌이 있었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더 자유롭게 흐름을 형성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마녀사냥의 절정기가 17세기라서 좀 미스테리이긴 하죠.
그런데 분위기에 휩쓸리고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고발 한게 다반사였지만
그 당시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자였고 무식했던 이유도 있었던거 같습니다.
또 특이할만한점은 그리스등 동유럽을 중심으로한 동방정교회는 마녀사냥과 관계가 없다고 하네요.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405426X
중세시대는 수도원이나 교회의 역활이 컸습니다.
중세유럽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우리나라에서 유교나 불교의 영향력보다 더 컸던거 같아요
양조기술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대학이 생기기 전까지는 교육기관의 역활도 했고
중세의학은 갈레노스 의학을 흡수해서 수도원의학 이라고 할정도로 의술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명맥이 이어져 왔더군요.
신학이나 종교 외적인부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거 같습니다.
중세시대의 유럽은 종교나 철학사상들이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가 그 역활을 한거죠.
중세시대유럽..알고싶어서 담아갑니다
중세시대유럽..알고싶어서 담아갑니다 22
역사는 파고 들수록 흥미롭습니다.
우와 덕분에 중세유럽사 공부하네요
딸들까지 돌아가며 제사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딸에게도 재산분배가 되어 처가 덕분에 부자된 남자들도 있었죠.
양란 이후에 여성차별이 많이 심해진거구요.
조선후기에 와서 평민에게 있어서는
유교적 학문보다 남성중심의 차별적인
유교문화가 깊어져서 그렇지
사서삼경 중 몇 권만 훓어 보아도
유교가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철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경에는
'요새 부모의 삼년상을 치르는 사람을 내가 보기만 한다면 그를 존경할텐데~'
뭐 이런 내용의 시가 있어요.
이 사람이 조선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갔다면
몇 명 볼 수 있었겠죠.
고대 중국도 이러한데
유교의 원조도 아닌 한국만
시대가 흐르면서 남성들이 명분만 살아있는 제사에 목숨걸게 된거죠.
중세 유럽 역사와 관계없는 얘기만 지꺼렸네요~
갈릴레이재판 글이 있길래 관련기사를 퍼왔습니다.
카톨릭과 과학의 갈등이 과장되었던거 같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kistiscience/305540.html
참고로 태양이 지구주위를 돈다거나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탄하다는 주장은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등 전세계 모든 종교경전들에 나와있는 공통된 내용입니다.
"오직 세계에 대한 직접적 탐구를 하지 않는 논리학만이 허용되었을 뿐"이었다는건 명백히 틀린말입니다.
형이상학인 신학을 제외하더라도 중세시대에 논리학만 있었던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그리고 근대시대의 카톨릭은 정치지향적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가 뿐만 아니라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가 비합리적이죠.
기독교의 시각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모든 유형의 탐구는 금지되었다는 주장도 그게 어느정도냐의 문제입니다.
카톨릭이 정치집단화되면서 권력을 추구하였고 자신들의 권력에 위해가 된다고 판단되면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핍박하고 배척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겁니다..
그러니까 종교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동시대에 기독교와 비슷한 유형의 종교를 가진 이슬람 문화권은 세계에서 가장 학문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방정교회는 카톨릭과 같은 기독교지만 카톨릭과 같은 폐단을 일으키지 않았어요.
오해하실거 같아 덧붙여 말씀드리지만 저는 종교가 없는 사람입니다.
175.210.xxx.147.... 이사람 불교신자 입니다.
윤회설 안믿는 천주교인 한테 아까운 쌀 축내지말고 일찌감치 저세상 가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기독교가 야만적인 종교라고 주장하는거 보니까 불심이 상당히 깊은거 같군요.
개신교에만 광신자들이 있는줄 알았는데 불교에도 광신자들이 있더구만요.
세상에 합리적인 종교가 있기나 한지...ㅎㅎ
불교 광신자 때문에 신을 믿지않는 내가 천주교를 옹호하는 경우도 생기는군요.
루터의 대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5세기 유럽에서 종교는 정치와 지배의 수단이었다.
수도원은 타락해서 민중을 수탈했고 귀족들의 사교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루터의 혁명은 ‘성서를 다시 읽는 것’이었다. 루터는 성서를 끊임없이 다시 읽고 세상이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시 문맹률은 95퍼센트였다.
그런데도 그가 쓴 95개조의 의견서는 불처럼 유럽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집단 독서’로 성서를 낭송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성서를 ‘읽는 법’을 가르쳤다.
루터에 대해서 농민 봉기를 부추겼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막기 위해 노력했다.
혁명에 있어서 ‘폭력’은 전혀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루터가 ‘읽는 법’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혁명에서 폭력은 새로운 텍스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차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루터의 대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5세기 유럽에서 종교는 정치와 지배의 수단이었다.
수도원은 타락해서 민중을 수탈했고 귀족들의 사교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루터의 혁명은 ‘성서를 다시 읽는 것’이었다.
루터는 성서를 끊임없이 다시 읽고 세상이 텍스트를 따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시 문맹률은 95퍼센트였다.
그런데도 그가 쓴 95개조의 의견서는 불처럼 유럽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고 ‘집단 독서’로 성서를 낭송했다. 그는 대중들에게 성서를 ‘읽는 법’을 가르쳤다.
루터에 대해서 농민 봉기를 부추겼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면 막기 위해 노력했다.
혁명에 있어서 ‘폭력’은 전혀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루터가 ‘읽는 법’을 가르쳤다는 점이다.
혁명에서 폭력은 새로운 텍스트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차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지적지식에 감탄하고 갑니다. 어떤 시대든 섣불리 규정하지는 말아야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