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정원일이 참 좋아요

정원사 조회수 : 917
작성일 : 2013-05-04 09:31:29
봄이 한국보다 한참 늦은 나라에 살아요.
오월이 시작된 지금에야 겨우 정원일을 시작했어요.

겨우내 쌓여있던 묵은 잎들을 긁어내고
화초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잡초들을 뽑고....

몇시간을 흙더미 위에 엎드려 사지로 기다시피 하며
정원일을 하는데 풀 내음, 땅 내음 정말 좋아요.

어젠 이른 아침부터 정원일을 시작했는데
방학하고 집으로 돌아온 딸이 무슨 마음인지
함께 나가겠다고 하더군요.

잡초랑 화초를 구분하지 못하는 딸에게 이것 저것만
뽑으라고 알려주고 일을 시작했지요.

딸이 금방 싫증내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세 시간 넘게 나랑 함께 흙 위에 엎어져 
풀 뽑으며 놀기에 마음이 더욱 흐뭇했지요.

몇년전 동네 가든 클럽에 나갈 때 자칭 타칭 내노라하는
정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몰입된 정원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영향을 준 분들이 꼭 있더군요.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척분 중에
정원을 가꾸던 분들을 도와드리며 나누었던 교감이
훗날 성장해서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해요.

나에게는 할아버지가 그런 영향을 주셨어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가족마다 희비가 엇갈리는데
이상하게 나는 좋은 추억만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오십년, 길다면 긴 세월을 살아오며 이런 저런 고비들을
많이 넘겼는데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힘을 얻은 적도 많았지요.
(더불어 할머니도...)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 것도 할아버지의 정원이 늘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덕분일거에요.

아쉬운 것은 할아버지의 정원에서 자라던 나무들 중
내가 인상깊게 기억하는 나무들을 내 정원에서는 키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고향집과 지금 살고 있는 곳의 기후가
다르기때문이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처음엔 그게 너무너무 속상했지만 나 나름으로 애정하는 꽃이나 나무들을 
차츰차츰 만나게 되면서부터는 서운함이 많이 사라졌어요.
 
되돌아보면 가슴 아픈 일들도 많았고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지도 모를 미결의 문제도
여전히 내 삶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 있지만
과거와 미래를 다 내려놓고
화창한 오월의 봄날 흙 속에 엎어져
꼼지락거리며 일하다 보면
불안한 나자신과 그런 나를 둘러싼 세계의 불완전함이란 다 사라져버리고
고요함이 남아요.

오랫동안 갈망하던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던 욕심마저
사라져버리고 지금 여기 풀매고 있는 나만이 현존하는
그 몰입의 시간이 참으로 좋습니다.




IP : 209.195.xxx.201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좋아요.
    '13.5.4 10:01 AM (121.147.xxx.224)

    뭔가 신성한 노동을 한 후에만 느낄 수 있는 청아함이 제게도 느껴지네요.
    저도 그렇게 흙을 만지며 지내는게 꿈인데요, 저는 저희 친정아빠의 영향으로요 ^^
    아직은 애들이 너무 어리고 내내 아파트 생활만 해온지라 주택은 꿈만 꾸고 있는데,
    원글님 글 덕분에 그 꿈을 다시 일깨우는 아침이에요. 감사합니다.

  • 2. ^^
    '13.5.4 11:07 AM (1.235.xxx.88)

    저도 가꿀 수 있는 내 정원이 있으면 좋겠어요.
    오래된 아파트라 화단이 무척 넓은 편인데 거기서 토끼 준다고 풀 뜯거나
    비 온 뒤 아이들이랑 학교 운동장에서 수로만들기 놀이같은거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내 정원을 예쁘게 가꾸는 일이면 더 행복하고 즐거울 것 같아요.
    흙 만지다가 보게 되는 작은 벌레나 풀꽃들 보면 너희들도 참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 반갑기도 해요.

  • 3. .....
    '13.5.5 1:26 AM (41.130.xxx.0)

    어릴적 아버지께서 시골 출신인지라 옥상에 화단을 만들어서 파부터 시작해서
    배추,방울 토마토,석류나무,포도 심지어 옥수수까지 심으셨어요.
    어릴때는 여름날 여름방학때 매일 매일 물 주는게 귀찮아서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물 준적도 있는데
    지금 나이가 들어가니 외국에 사는데도 괜히 뭔가를 심어보고 싶고 그러네요...
    그런데 어찌된게 기르는거 마다 죽여놔서요...ㅎㅎㅎ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248529 근육 운동하고서 탄수화물이 심하게 땡겨요. 9 ... 2013/05/04 2,477
248528 파운데이션색은? 2 얼굴색 2013/05/04 1,004
248527 스맛폰 이조건 봐주세요(컴대기) 9 ,, 2013/05/04 759
248526 소위 요녀 화류계스타일 여자 8 2013/05/04 7,907
248525 크리스틴스튜어트랑 연정훈 무슨 사이인가요? 1 물방개 2013/05/04 3,665
248524 고속터미널 옷집주인에게 모욕ㅠㅠ 39 ᆞᆞᆞ 2013/05/04 16,314
248523 약사님 계심 좀 봐주세요. 아기가 약먹고 계속 자요 ㅠ 6 2013/05/04 4,972
248522 오사카여행을 가는데요, 교토 외에 또 어딜 보면 좋은가요? 13 궁금 2013/05/04 2,805
248521 초5엄마표 원글이예요 교재좀 알려주심 안될까요? 4 감사합니다 2013/05/04 1,074
248520 남편과 사별 뒤 시댁과 왕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35 // 2013/05/04 17,652
248519 저 같으신분 주말 어떻게 보내나요? 12 주말에 넘 .. 2013/05/04 2,743
248518 아이가 입안쪽으로 이가 나네요.ㅜㅜ 11 인영맘 2013/05/04 2,118
248517 장윤정의 그 많은 재산을 모두 말아먹었다는건 말도 안되는거 같고.. 8 ... 2013/05/04 15,322
248516 소개팅남에게 문자 또 보내면 질척이는 걸까요? 38 게자니 2013/05/04 11,883
248515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고 왔어요. 3 아이 책 2013/05/04 1,918
248514 캐나다 친구에게 놀러가자는 친구 5 헐헐헐 2013/05/04 1,642
248513 엘지로 바꾸려고 하는데 요즘스마트폰.. 2013/05/04 370
248512 T끼리 무료통화라는게 SKT 끼리 무료통화란 소린가요? 2 아프로디테9.. 2013/05/04 3,862
248511 나인 1회부터 정주행. 괜히 봤어요 9 caffre.. 2013/05/04 2,263
248510 1948년 5월 14일 정오, 한반도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 2013/05/04 671
248509 다방면으로 박식하신분들은? 18 부러워요 2013/05/04 4,192
248508 수영할 때 끼는 물안경이요..... 3 물안경 2013/05/04 1,019
248507 평수따라 비용차이는 안맞는거 아닌가요? 6 가사도우미비.. 2013/05/04 1,102
248506 설거지하느라 서있으면 다리가 붓는 느낌있지 않나요? 4 2013/05/04 1,272
248505 토크쇼 어떤게 재밌나요 ? 2 ........ 2013/05/04 661